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부분이 있더군요. 그것은 바로 대통령의 부당한 명령에 대해 단호하게 "No"라고 외칠 수 있는 관료집단의 존재였습니다. 요즈음 대통령의 불법적인 지시 혹은 명령에 맹종하다가 줄줄이 엮여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은 왜 "아니요."를 외치지 못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단지 부당한 지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명백하게 불법적인 지시였는데도요. 그들은 그 알량한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불법적 행동에 앞장서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소위 공직자란 사람들이 명백하게 불법적인 지시에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앞장서 하수인이 되기를 자청했다는 건 도대체 납득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코미디나 풍자의 웃음은 약한 자가 저보다 막강한 자를 괴롭히고 골탕 먹이는 힘의 격차에서 발생한다. 만일 그 관계가 역전되면 코미디가 아니라 아무 재미가 없거나 공포물이 될 것이다. '더러운 잠'은 애초에 소재 선정이 좋지 않았다. 이미 박근혜 스스로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추락할 대로 추락한 마당에 더 이상 풍자할 것이 남아 있지 조차 않다. 수개월 전에 '더러운 잠'이 발표되었다면 세련되지는 못하나 용감하다는 평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2. 책이나 컴퓨터를 가까이에서 보면 혹은 많이 보면 근시가 심해지나요? 책이나 컴퓨터 등 가까운 물체를 오래 보고 있으면 눈 안의 근육(모양체 근육)이 계속 수축하여 수정체의 굴절률이 일시적으로 증가하여 일시적 근시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근거리를 더 이상 보지 않고 먼데를 보거나 눈을 잠시 감고 쉬면 금방 모양체 근육이 이완하여 수정체 두께도 원상 복귀하므로 영구적으로 근시를 유발하지는 않습니다.
인공지능(AI)이 체스(1997), 퀴즈쇼(2009), 바둑(2016)에 이어 또 하나의 대기록을 세웠다. 이번 대결은 특히 계산이나 학습 능력의 대결장이었던 지난 3번의 대결과 달리,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할 직관, 감정 등의 심리적 요인까지 개입된 것이어서 더욱 놀라운 일로 평가된다. 이세돌과의 바둑 대결에서 이긴 구글의 알파고가 스스로 경기를 학습해 실력을 쌓는 딥러닝 방식을 이용한 반면, 리브라투스는 게임을 거듭하면서 쌓이는 통계를 토대로 상대방 선수의 독특한 게임 습관 등을 파악해 과감한 베팅 전략을 구사했다. 예컨대 상대의 특성을 파악해 패가 나쁜데도 높은 금액을 베팅하는 블러핑 기술까지 보여줬다.
미얀마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대사에 임명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현지에서 상당한 민원이 발생했을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런 소동을 외교부나 국정원, 혹은 관련 부처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영사업무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른다. 항상 외교부 개혁방안에서 영사업무의 혁신이 중요한 내용 중 하나였다. 그러나 베트남이나 미얀마의 사례를 보면, 참담하다. 공관장이 산적한 외교현안을 팽개치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국력을 동원했다. 앞으로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부패가 하나하나 드러날 것이다.
이제 트럼프의 선거 때 막말을 두고 유세 때와 당선 뒤는 다를 것이라든가, 미국은 제도화가 잘 되어 있는 나라이므로 대통령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정신승리법'적인 전망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트럼프가 앞으로 얼마나 대통령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 모르지만, 세계는 당분간 미치광이 트럼프, 깡패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과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 강대국의 흥망사를 보면, 포용·개방적일 때 흥했고, 배제·폐쇄적일 때 망했다. 결국 미국도 그런 역사의 법칙을 피해가지는 못할 것이다.
최후까지 기름장어답다. 희생과 헌신이라는 것은 해본 적이 없는 암기형 고시를 통한 엘리트. '운의 힘'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 덕택에 여기까지 온 주제에 마치 자신의 능력 때문인 것으로 오만한 착각을 했다. 비록 본인의 주판알 튕기기의 결론으로 일찌감치 대선불출마 선언을 한 것이지만 한국 정치를 위해 잘한 결정이라고 본다. 책임감과 소명의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지나가는 나그네'같은 인간이 한국보수를 대표하는 것은 한국 보수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한국 정치의 비극이기도 하다.
조금만 더 자세한 사운드 효과만 있다면... 메뉴만 읽어줬더라면... 조금만 더 신경을 써 주었더라면 정말 그 조금만에 대한 마음이 게임을 하는 내내 간절했습니다. 마치 그 조금의 간극이 사회에서 보이는 장애에 대한 작은 인식의 차이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직접 게임을 해 본 경험으로는 모든 것을 다 음성으로 읽어주거나 하지 않아도 지금의 효과들만 조금만 더 정밀하게 수정한다면 시각장애인들도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도 스마트폰 역시도 처음부터 시각장애인들에게 그 접근성을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취임사에서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로 만들겠다"며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비전으로 다시 강조했다. 그가 생각하는 위대함의 정체가 뭔지 모르지만 적어도 장벽을 쌓고, 종교를 이유로 남을 차별하고, 고문과 불법구금으로 인권을 탄압하고, 언론과 맞서 싸우는 것이 위대함과 거리가 먼 것은 분명하다. 경제에서 안보까지 모든 것을 오로지 미국의 이익에 입각해 판단하고 결정하겠다는 것 또한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문재인 전 대표는 매일 까인다. 특히 종편에서는 하루 종일 까인다. 이젠 그런 소리를 듣고도 분하고 억울하기는커녕 그냥 데면데면해질 정도다. "문재인은 절대 안 돼"라고 외치며 노냥 까대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레파토리는 두 가지다. 하나는 종북이고 하나는 말 바꾸기다. 곰곰 생각해보면 오래 전부터 많이 들어본 레파토리다. 그렇다. 이것은 김대중 대통령을 오랜 기간 짓눌러오던 낙인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을 향하던 낙인찍기가 노무현 대통령을 거쳐 문재인에게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여기 가족이 있고 사유 재산이 있고 어린아이가 기다리고 있고 직장이 있고 내 비자가 합법적이고 세금을 내고 있고... 등등 기타 모든 사정과 하등 관계 없이 90일 동안은 집으로 갈 수 없다. 난데없다. 아이를 동반하고 있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미성년자를 동반한 경우에 대한 예외도 없다. 아이 역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고 학교에도 갈 수 없다. 학생들도 마찬가지고 출장자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이유도 없는 거다. 그냥 국적이 문제일 뿐. 그러니 저 행정명령은 말할 수 없이 황당한 동시에 매우 공포스럽기도 하다. 미국이 저런 짓을 7개 국가 국민 및 난민을 대상으로 난데없이 저지를 생각을 했다면 같은 짓을 어느 나라를 대상으로 해서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면초가에 몰린 박근혜가 복수혈전을 예고하는 발언을 했다.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이 공개한 '박근혜 대통령 인터뷰 뒷이야기' 동영상 칼럼에서 "박 대통령에게 '지금 검찰이나 언론의 과잉되거나 잘못된 것에 있어서 탄핵이 혹시 기각되고 나면 정리를 하시겠느냐'고 묻자, (박 대통령이) '어느 신문이 어떻고, 이번에 모든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국민의 힘으로 그렇게 될 거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밝힌 것이다. 재와 박근혜의 문답을 박근혜 번역기에 넣고 돌려보면 '내가 왕좌에 복귀하면 내 힘으로 검찰과 언론을 대대적으로 숙정하겠다' 정도가 될 것이다. 정말 섬뜩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취임 일주일 만에 트럼프가 대통령을 맡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게 끔찍할 정도로 명백해졌기 때문에 탄핵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건 자신만의 현실에 살며 그냥 말로만 떠드는 후보일 때와는 다른 문제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속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통치는 진짜 현실이다. 현실에선 반발이 일어난다. 트럼프가 우러러보는 여러 독재 정권과는 달리, 헌법과 정치적 견제가 복잡하게 얽힌 미국의 체제는 독재를 막는다. 간신히 막아내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막긴 막아낸다. 그리고 트럼프의 행동이 무모해질수록 견제도 더 강해진다.
대한민국의 그 어느 법률과 규칙에도 특정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고 하여 방송에서 퇴출시키도록 하는 조항은 없다. 특정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공화국 시민의 권리이다. 그러므로 이를 막아세우는 법률과 규칙은 없으며 공영방송의 내부 규정과 준칙에도 이 권리를 침해하는 조항을 둘 수 없는 것이다. KBS가 내린 나에 대한 출연 금지 결정은 따라서 위법하게 나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나는 침해당한 내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공화국의 시민이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1970년대에는 나도 그렇고 우리 레즈비언 선배들도, 그리고 한국 사회도 혼란스러웠어요. 그때의 매체들, 예를 들어 선데이 서울 같은 잡지에 동성애자들에 대한 안 좋은 기사들, 남장여자가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둥 두 여자가 손잡고 투신자살을 했다는 둥 이런 기사들이 많았었는데 그런 것들이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들었죠. 하지만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어요. 얼마 전 '비 온 뒤 무지개재단' 법인 설립 불허가처분 취소 소송에서도 승소한 걸 보면 정말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만약 예전 같았으면 다 잡혀갔었을 거예요.
존이 요새 우디 앨런 영화 속 주인공이었다면 끝까지 자기연민과 자기기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매기스 플랜〉에서 그는 이 악순환에서 빠져나갈 기회와 마주친다. 우디 앨런 영화와 〈매기스 플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건 이 영화가 존에게 감정이입할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는 여성 작가/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존이 자신에게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 연구 결과를 존에게 통보한다. 그리고 존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동거하기 전, 우리는 자주 모텔에 갔다. 섹스할 곳이 없었으니까. 모텔은 비싸서 DVD방에서 황급히 일을 치르기도 했다. 어느 날 섹스 후 그가 말했다. "우리, 이제 너무 자주 모텔에 오지 말자." "응. 왜요?" "사람들이 그렇게 볼 수도 있어. 혁명한다는 애가 여자랑 이런 데를 와? 하고 말이야." 수긍했다. 모텔에서 나오는 길에 아는 사람과 마주칠 때 민망했으니까. 그런데 그의 말이 왠지 거북했다. 나는 그저 '여자'이고 우리가 교감하는 이곳은 '이런 데'일 뿐인가.
성실한 수컷 불스들에게 '바소프레신'이란 호르몬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했더니, 평소에 자상하던 수컷이 교미가 끝나기가 무섭게 자취를 감춰버렸다. 게다가 산에 서식하는 불스를 유전적으로 변형해 바소프레신 수용체 양을 늘렸더니, 바람둥이 수컷 불스들이 갑자기 한 파트너에게 전념하고 새끼를 키우는 데 몰두하더라는 것이다. 이런 연구 결과는 카사노바의 바람기가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내포하고 있다.
몇몇 댓글이 눈을 찔렀다. "폼으로 맥 사놓고 윈도 프로그램 쓰려고 하네. 그럴 거면 왜 샀냐?" "왜 맥에서 돼야 함? 여기가 미국이냐 ㅋㅋㅋ." "걍 윈도 쓰면 되잖아." 아득했다. 불편하면 윈도 쓰라고? 언제부터 마이크로소프트 윈도가 우리나라 표준 PC 운영체제가 됐단 말인가. 이 나라에선 '운영체제 선택의 자유'는 없는가. 맥 PC를 쓰는 일이 왜 허세로 비치는 것일까. 백번 양보해서, 허세로 맥을 쓰는 이용자는 공공서비스에 접속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건가. 언제부턴가 이 당연한 요구는 마치 '떼쓰면→선심 쓰는' 일처럼 인식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