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아내는 좀비입니다]
좀비 가족을 둔 사람들이 살아가는 거주 구역이라는 소재는 현실의 무언가의 알레고리같이 여겨지지만, 작가는 그런 해석의 여지를 두기만 할 따름으로 적극적으로 그런 해석을 유도할 만한 어떤 통찰을 넣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난 세기 할리우드 공포영화같이, 욕망에 추동되며 어리석은 행동을 하여 파국을 부르는 민폐 여성 인물과 그에 대비되는, 상황에 대응하여 세계를 유지하는 남성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묘한 기시감을 준다. 주인공을 향한 고미호 씨의 대사 “나도 그쪽 이해 안 되니까.”가 어쩌면 이야기를 뒤엎는 돌쩌귀가 될 수도 있었을 듯한데 주인공의 긍정적인 인물상에 균열이라고 할 만한 것이 드러나게 제시된 바가 없어 그런 기대는 기대에 그친다.
[삼시세KILL]
’~가 ~를 하는가 싶더니’ 같은 서술은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의 시각이므로, 관찰자가 제시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주의해 써야 한다. 또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틀린 곳도 많다. 하지만 이런 것은 고칠 수 있는 결점이고, 자기 이야기의 재미를 잘 아는 작가의 재능이 훨씬 드물고 소중하다. 노년의 인물을 너무 전형적으로 어수룩하게만 묘사한 점이나 사건이 지리멸렬한 점도 같이 섞인 탁월한 관찰, 훌륭한 재현과 어우러지면서 일부러 설렁설렁 눙치는 것처럼 보이고 이야기를 크게 해치지 않는다. 특히 중간쯤에 ‘~는 수년이 지난 후에도 이 ~를 간간이 떠올린다.’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보통의 경우라면 소설의 김을 빼버리는 케케묵은 수법임에도 여기에서는 오히려 이후를 입맛 다시며 즐기라고 미리 길을 깔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 유쾌하고 감탄스러웠다. 이야기꾼으로서 분명한 강점을 가진 작가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믿고 건필하시기를 빈다.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조직행정물’ 또는 ‘업무처리물’이라고 부르면 좋을 것 같은, 회사나 기관 내 일 처리의 부조리를 주 소재로 삼은 단편들이 재미있다. SF 장르에서 여러 편 본 것 같은데 좀비 아포칼립스와도 아주 잘 맞는다는 걸 이 소설이 보여 준다. 깔끔하게 잘 뽑힌 단편이다.
[아웃백]
여성 화자와 남성 화자가 번갈아 가며 1인칭으로 말하고 있는데, 매번 몇 줄 읽은 후에야 화자가 누구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혼란스럽다. 도하라는 이름이 있는 남성 화자의 아이와 그냥 ‘딸’이라고만 불리는 여성 화자의 아이, 두 아이를 오버랩시키기 위해 일부러 연출한 것인가 싶지만 득보다 실이 많아 보인다. 다른 작품에서도 비춘 바 있는 ‘어차피 지금도 서로 잡아먹으려 하는 세상’이라는 발상과 ‘오랜 시간이 흘러’ ‘선량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원망은 균형감이 좋다.
[화촌]
사건과 장면을 탄탄하게 짜는 작가. 머릿속에서 영상화가 이루어지게 하는 솜씨가 훌륭하다. 다만 판에 박힌 인물 처우는 그리 재미있지 않다. 직업이 있는 30대(아마도 초반) 남성이 주인공인 가운데 외국인 노동자, 노인, 휴게소 주방일 하는 여성들과 같은 주변부 인물들을 출연시킬 때에는 이들을 무엇으로 대우하고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와 똑같이’는 그리 재미있는 답은 아니다.
인물 처우에는, 인물이 무엇을 하는가와 함께 서사 속에서 그에 대하여 어떤 벌/상을 받는가도 포함한다. 예컨대 어떤 인물이 고결한 행동을 한 결과 도리어 모두에게 해가 되었다면 그저 아이러니를 원한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수용자에게는 ‘고결함은 어리석다’라는 교훈이 발생한다. 더 미묘하게는 처녀성을 잃은 여성이 그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잠시 후 작중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면 ‘처녀성을 잃으면 처참하게 죽는다’ 내지 ‘성교를 하려면 처참히 죽을 각오도 해야 한다’, ‘여성의 첫 성교=죽어도 싼 일’ 같은 효과가 발생해 버린다. 전부 죽어버리는 호러 장르에서도 선후의 차이가 있다. 아니, 오히려 호러 장르에서야말로 이런 인과가 잘 드러난다. 방종한 젊은 남녀는 많은 사람들이 징벌하고 싶어 하는 인물상이고, 그래서 과거에 이들이 징벌받는 서사는 가려운 데를 긁어주듯 고소했다. 주변부 인물은 ‘가치가 덜하다’고 여겨지며, 그래서 이들의 소모는 오락성과 찜찜함의 가성비가 맞았다. 하지만 새로운 소설이 쓰일 때에도 여전히 그런가? 작가들은 매번 조금씩 새로운 카타르시스, 새로운 가성비를 찾아간다. 모든 것을 혁명하진 않더라도 약간의 변주를 더해 볼 수 있다면 작가의 성실함에 값하는 더 큰 결실이 있을 것이다.
[문 너머에]
여자에게 포위당한 남자. 중심에 구남성 스테레오타입이 있다. 그리고 생시에는 무력하다가 억울한 죽음 후에 가장 강력해지는 처녀귀신이 있다. 즉 인간계에서 어떤 식으로든 배제되어 성스럽거나 불가해하거나 불길하거나 한 대상, 아름답거나 더러운 희구 또는 멸시의 대상으로 물화되어야 비로소 힘을 갖게 되는 여성이다. 이 조합 자체는 워낙 클래식한 것이라 아이러니를 가미한다고 해서 새로워지지 않는다. 시선은 남성 머리 위에 머물러 등장하는 세 여성을 본다. 열일곱 살쯤 먹었지만 핏기없는 얼굴과 왜소한 체구로 해서 주인공 남성에게 ‘소녀’, ‘아이’라고 불리는 세 번째 여성 인물은 좀비가 되어 마주 격투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 여자’라고 지칭된다. 작가의 태도는 일관되고 정직하지만, 새로운 이야기에 있어야 할 한 발짝의 새로움이 아쉽다.
[다이웰 주식회사]
가족 이야기에 좀비라는 소재를 때운 자국도 거의 없이 말끔하게 결합했다. 화자가 딸일 때 ‘엄마’는 기존의 세계와 기성세대를 아주 쉽게 효과적으로 대표한다. 이야기에 사건이 결핍돼 있지만, 나를 억압하는 과거–세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화두인 만큼 치명적인 약점은 아닌 듯하다. 이야기는 작가의 성찰과 의지가 정직하게 반영된, 사이다도 고구마도 아닌 길로 진행된다. 무난한 수작이다.
[침출수]
노인들의 마을, 여성 청소년 주인공이, (생시에) 개차반(이었던) 중년 남성 좀비를 때려잡으려 추격에 나선다. 단순명쾌한 구조를 직선적으로 밀고 나간 이야기다. 여러 가지 시도가 가능했던 초기 좀비물이 진화해 좀비=감염 설정이 정착하면서 좀비 아포칼립스는 재난물이 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이것을 주인공이 뒤집어 버리는데, 장르로서는 반칙이지만 내적 일관성이 있다. 이것은 재난물이 아니라 클리너물이며, 감염은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시험인 것. 그리고 그렇다고 하면, 좀비도 죄가 있다. 그리고 영웅은 폭력으로 좀비를 척살한 끝에 인간성의 시험을 겪지만, 방관자이자 조력자이기도 한 인민과의 유대를 통해 인간성을 지킨다. 액션 드라마의 분위기와 문법을 잘 유지한 단편이다.
[네버랜드]
좀비 세상을 배경으로 한 남성 청소년의 사회생활 이야기: 특히 연상의 동성에 대한 동경과 친애의 감정을 중심으로. 낯설고 동조하기 힘든 어른들의 세계와 그 규칙들에 맞서, 소년이 찾는 것은 정 붙이고 신뢰해 봄 직한 대상이자 롤모델이기도 한 선배다. 작중에서는 한 번도 이 표현으로 지칭되지 않지만 바로 ’형’이다. 주인공 소년은 어떤 형에게 구조되고, 불합리와 불편이 가득한 공동체에 어쩔 수 없이 소속되어 적응하고자 애쓰지만, 결국 그 형에 대한 애정과 충성에서 그곳을 등지고 위험을 무릅쓴다. 그 형에 대한 신뢰와 정이 곧 마지막까지 오염되지 않은 인간성의 보루가 되는 셈이다. 배리가 그린 ‘네버랜드’의 아이들도 과연 소년들의 공동체이긴 했으나 선우나 재이가 피터 팬보다는 한결 믿음직해 보인다. 제 독자를 잘 찾아간다면 많은 즐거움을 줄 법하다. 선우와 재이의 이미지가 좀 중복되는 점, 주인공 시각에서 진행되던 이야기에 불쑥 선우의 회고담이 끼어 들어가고 거기 담긴 선우–재이 감정선이 겨울–재이 감정선과 겹치는 점은 아쉽다.
[이름없는 몸]
클럽 성범죄 카르텔과 고립된 산촌의 사자 부활을 엮어, 여성 경찰 두 명과 여성 직장인 한 명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조직적인 성범죄에서 재화로 유통되는 무명의 몸과, 가정내 인권범죄의 증거물이자 채 단절 못 한 과거의 상징물인 유해가 겹친다. 야심 찬 발상으로 훌륭하게 틀을 짰지만, 진행 및 결말이 그에 값하지 못하는 것이 그래서 더 아쉽다. 장르적인 이야기 전개 측면에서 보면 거짓 단서나 연결성이 느슨한 인물/사건이 너무 많다. 또 결말의 탈출과 폭발은 아무래도 만족스러운 뒤처리라고는 하기 어렵다. 그 앞을 장식하는 흑막 역시, 만들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왕 작중에 등장시켜 대사까지 준다면 누구를 대변하는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좀 더 숙고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런 미진함에도 불구하고 친구 영림과 주인공의 유대는 그야말로 더없이 잘 묘사되어 있어 흘려버리기 아깝다. 이 굉장한 ‘건더기’를 더 많은 분들이 읽을 수 있도록 수정을 해보시거나, 다른 작품에서 다시 한번 써 보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깔끔하게 잘 쓴 단편인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와 [다이웰 주식회사]를 떨어뜨려 아쉽다. 심사 기준을 완성도에 둔다면 상을 드릴 만한 단편들이었다. [이름없는 몸]은 대폭 수정을 요하는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점은 몹시 빼어나 우수작에 넣었다. [삼시세KILL]도 묘한 불균형 감이 있음에도 읽는 재미가 독보적이었다. [화촌]은 그림을 떠올리게 만드는 로케이션, 구색 좋은 등장인물 구성,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다소 엉뚱한 해결이 점수를 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