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처럼 언론이 집요하게 원래의 법 취지를 외면하고 본질을 왜곡하는 사례는 없었던 듯싶다. 우리 언론계 일부는 김영란법에 대해 헌법소원을 내기도 했고, 실행된 이후 1년 동안 계속해서 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고급 음식점 매출 감소, 한우와 굴비 선물 감소, 꽃배달 감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겹게 되돌리는 단골 메뉴다. '스승의 날에 학생들이 카네이션을 달아주지 못했다', '선생님에게 음료수, 커피 한 잔도 사 드리지 못한다', 최근에는 '신제품 출시 애플사에 한국 언론이 취재를 가지 못했다'는 등의 내용으로 지면을 채우기도 했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점점 강력해지고 있지만 술자리에서 '뽀뽀해'를 연호하거나 키스를 한 의원들은 자신이 동성애자로 오해받을까 걱정하진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날의 키스가 인간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권력을 향한 사랑이며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지타산에 맞춘 스킨십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굳이 탓한다면 술자리 여흥일 뿐이다. 결국 사랑이 없는 키스는 자유롭게 허용된다. 오히려 사랑을 담은 키스는 불온해지고 금지된다. 이 모순을 한국 정치는 언제까지 모른 척할 수 있을까.
'박근혜 정부에서 45년 된 미군의 중고 헬기를 구입하면서 1,500억원을 쓴 것으로 나타났다' 이 자극적인 제목의 뉴스가 언론에 소개되면서 뭔가 엄청난 방산비리가 나타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과연 그럴까. 팩트체크를 해 보자. 일단 '45년 된 중고헬기'라는 표현 자체가 오류다. 주한미군이 넘겨준 기체들은 현재 밝혀진 바에 따르면 1984~88년에 제작된 기체들이다. 우리 육군이 미국에서 직도입한 CH-47D들이 대부분 1988~1990년 사이에 들어온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기체들이다. 즉 구매할 당시는 둘째 치고 아직도 기령 30년이 안 된 기체들이다. 어디서 나왔을까? 45년이라는 숫자가.
이제 전 세계 어떤 나라도 '재생가능에너지로 전환하는 건 우리에게 불리한 일이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전 세계 200여 개국 중에 재생가능에너지 지원 정책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는 2016년 기준 176개국에 이릅니다.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크든 작든 재생가능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죠.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의 구분도 없습니다.
'3대장'이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팬서비스 좋지 않기로 유명한 세 선수를 말한다. 실력으로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들이지만 팬서비스 좋지 않기로도 한국을 대표한다. 일부 선수들은 사인 요청 거절을 넘어 팬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여 원성을 사기도 한다. 한국에서와 달리 외국에 진출해서는 사인을 잘해줘 '내수 차별'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선수도 있다. 미국에서 뛰다 한국에 온 외국인 선수들의 팬서비스는 하나같이 훌륭하다. 사인은 물론이고 자신이 쓰는 장갑이나 배트를 주기도 한다.
공수처는 고위공직자 범죄를 수사해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기관이므로 민간영역의 범죄는 원칙적으로 다룰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세다고 하는 재벌이 연루된 범죄가 검찰에 의해 부당하게 처리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공수처로선 검찰의 이런 행태를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검사들이 부당하게 사건을 처리한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범죄라고 볼 수는 없으므로 공수처가 수사해 처벌할 수도 없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본질적 질문을 해봐야 한다. 검찰은 왜 문제인가? 왜 젊은 검사들에게도 기업가는 줄을 대고 스폰서를 하려고 하는가?
이 방안은 근 20년 전부터 꾸준히 제안되어왔다. 하지만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검찰의 저항이 제일 컸다. 검사 출신 국회의원들도 저항했다. 이들은 검찰의 힘이 줄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온갖 명분을 내밀었지만 핵심은 기득권 지키기였다. 집권세력들도 원하지 않았다. 검찰 하나만 잘 다루면 되는 상황에서, 손쉽게 다룰 수 없는 조직이 생기는 걸 원하지 않은 것이다. 올가을 정기국회에서만큼은 공수처 설치 법률을 통과시켜야 한다.
실명을 공개하고 글을 쓰게 하면 ‘악플’이 줄어들지 않을까. 우지숙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2010년 인터넷실명제 효과를 연구한 논문에서 “실명제 실시 이후 게시글의 비방과 욕설 정도는 줄어들지 않았고 글쓰기 행위를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실명제의 본질은 인터넷 공론장에서 ‘민증 까고’ 의견을 표명하라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나를 추적할 수 있는 세상은 곧 감시사회다. 감시사회에서 글쓴이는 자기검열에 빠지고, 표현의 자유는 위축된다.
"미국과 동맹국이 위협받는다면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수밖에 없다" 이 막말의 배후에 있는 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맥매스터 안보보좌관과 매티스 국방장관에게 "6개월 내에 북한에 대한 군사 계획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지난달 미 합참의장이 중국을 방문한 것도 유사시 북한에 대한 군사행동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왜 6개월인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무릎을 꿇는 사람들이 모두 어머니들뿐이었다는 사실이다. 보도에서는 '학부모'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화면 속에서 '부'는 찾기 힘들었다. 낮에 열린 것도 아니고 저녁 7시30분부터 열렸는데 왜 아버지들은 없었을까? 어딘가에 있었는데 무릎을 안 꿇은 것일까? 개개인이나 장애인 어머니 조직의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장애 아이를 낳거나 아이가 장애를 가지는 순간 거의 100%의 양육 책임을 혼자 짊어지게 된다는 장애인 엄마들의 현실의 한 단면을 보는 듯했다.
'역지사지'는 굳이 진보가 아니더라도 공동체에서 보편적으로 강조하는 개념이다. 내가 당하지 않았더라도 타인의 고통을 내 일처럼 느끼는 감수성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필수덕목이라고 강조한다. 이재명 시장의 일갈에 시민들이 환호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한 편으로는 당해봐야만 안다는 정 반대의 주장 또한 대중의 환호를 받는다. 어떤 부류의 인간들은 애초부터 역지사지의 공감력이 작동하지 않으므로, 고통의 당사자와 똑같은 고통을 겪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는 '역지사지'와 '너도 당해봐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한다.
저는 저를 향한 수많은 악성댓글을 접하면서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댓글을 쓴 사람 중 다수는 제가 불쾌감을 느끼고 제 가족들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저를 좀더 불행하게 만들기 위한 단어와 표현에 열중한다는 걸 느꼈죠. 그래서 저는 이게 단지 디지털 세대의 문제라고 보기도 힘들고, 그들이 공감하지 못해서라고 보지도 않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아니라 주장을 관철하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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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활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장시간 휠체어 생활을 해야 했다. 장시간 휠체어에 앉아 있어야 하는 나에게 매달 해야 하는 생리는 고통의 근본이었다. 생리가 시작되는 날이면 아무도 모르는 괴로움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여름철엔 더욱더 괴로움이 크다. 여름에는 휠체어 앉아있는 것만으로 힘든데 생리까지 하게 되면 생리대의 표면이 땀에 젖은 살과 닿아서 마치 오물을 깔고 앉아있는 기분이 된다. 더구나 양이 많은 날에는 조금 더 두꺼운 생리대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날이면 차라리 자궁을 떼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아이들의 배움터인 '학교'를 '혐오시설'이라 이름 붙이고 약자들을 무릎 꿇린다. 기간제교사인 나는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채용시험과 면접을 보러 다녔다. 홀몸에 사지 튼튼한 나도 찾아가기 힘든 구석자리에 처박아놓은 듯 자리한 몇몇 특수학교를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다. 접근성이 뛰어나도 학생들이 올 수 있을까 말까인데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우리 아이들의 배움터는 일반인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어야 하나. 나의 일터는, 정말로 '혐오시설'인가.
정치를 사전에 쳐보니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라고 나오더라. 나라를 다스라는 일이라니, 너무 멀게 느껴지지 않나? 간호사들의 목소리, 학생들의 목소리 같은 게 모여 나오는 목소리가 정치적 목소리이다. 생활의 문제를 잘 들여다보면 정치와 밀접한데, 우리는 그걸 정치와 연관 지을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정치가 우리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민원을 넣고 감시하는 일, 그리고 정치를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생활 속에서 정치와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
21세기가 된 지도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아직도 "개를 왜 공원에 데리고 오느냐"는 이야기를 듣는 사회가 정상적 사회인가? 심지어 시각장애인 안내견과 함께 호텔에 투숙하려는 이를 거절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냐는 말이다. 지금까지 인간 사회와 동물의 관계를 대하던 그 숱한 나태, 관계 기관의 그 숱한 직무유기, 그릇된 인식으로 개를 키우던 인간의 그 숱한 무책임,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에 대한 사회의 그 숱한 무시, 이 모든 방관은 다 어디에다 두고 강력한 법을 만들어 입마개를 씌우고 개들을 안락사시켜 문제를 눈에서 보이지 않게 만들면 된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사회가 발전을 이야기하고 인격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해방 이후에 출간된 한국문학(일본어로 쓴 한국문학을 포함한)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꼽힐 만한 걸작인 〈화산도〉는 한국의 유수하다는 문학출판사에서 출판되지도 못했다. 그리고 작품의 완역본이 몇 년 전 출간된 뒤에도 내가 알기로 주요문예지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평문으로 거의 다루지 않았다. 작가의 성취에 걸맞은 국내의 명망 있는 문학상을 수여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짐작컨대, 일본어로 쓴 김석범 문학은 '한국'문학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그런 점에서 김석범 문학은 역설적으로 한국문학의 경계와 의미를 묻는 역할도 한다)
아무리 늦어도 피부에 증세가 나타난 후 72시간 이내에 약을 써야 합니다. 늦으면 '대상포진후 신경통'이란 합병증이 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이러스로 인해 신경 자체가 손상되고 파괴되어 나타나는 질병입니다. 아파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신경에서 계속 아프다는 거짓신호를 보내옵니다. 대상포진 후 신경통은 매우 아픕니다. 칼로 살을 베는 듯 아프다고 말합니다. 불에 타는 듯 아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수주에서 수년 동안 극심한 통증에 시달립니다. 일반적인 진통소염제로 효과가 없어 신경파괴술이나 마약성 진통제를 쓰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