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정신력 사랑은 각별하다. 학교에서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 주입한다. 이를 종교처럼 신봉하는 이들도 있다. 김성근 전 한화 이글스 감독이 대표적인 경우다. 김 전 감독은 선수들에게 정신력을 강조하며 한계를 깨는 순간 앞으로 치고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매일 계속되는 '특타'와 '특훈'으로 몸이 지치는 것도 작은 부상도, 의지만 있으면 문제되지 않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투혼 신봉자도 혹사와 잘못된 몸관리로 스물다섯 이른 나이에 선수 생활을 접었다는 것이다. 김 전 감독의 지론에 따르면 투수 김성근은 한계를 깨지 못한 선수였다.
〈택시운전사〉 에는 억지스러운 설정(예컨대 광주를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도로에서의 추격씬)이 곳곳에 있고, 배우들의 개별적 연기는 돋보이지만, 연기의 합은 조화로워 보이기보단 어수선해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가 〈택시운전사〉 를 봐야 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광주민중항쟁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학살의 원흉 전두환, 일베 등이 보여주는 것처럼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에는 광주민중항쟁을 왜곡하고, 폄하하고, 모독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에 맞서 광주민중항쟁을 정확히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련의 작업들은 소중하고 필요하다. 〈택시운전사〉 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언론에는 온통 박찬주 대장(군사령관)이 공관병에게 '갑질'을 했다는 내용만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뿐이 아닙니다. 제대로 검증할 경우 군 인사에 상당한 파란이 예상됩니다. 도대체 군 인사는 도처가 지뢰밭입니다. 제대로 검증하다 보면 지난 정부에서의 적폐가 상당부분 밝혀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덕성 문제, 과거 사조직 전력, 과거 정권 측근 실세 등 여러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군 인사들을 놓고 보면 결국 "쓸 사람이 없다"는 탄식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시각장애인들을 보는 관점 중 하나는 신기한 능력을 가졌을 것이라는 오해이다. 악기연주를 엄청나게 잘하거나 보지 않고도 길을 찾고 뭔가 특별한 것을 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들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냥 말 그대로 오해일 뿐이다. 우리 학교 아이들 중에도 천재처럼 악기를 연주하는 절대음감 가진 아이들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그냥 악기를 잘하는데 눈이 안 보이는 것이다. 시력의 부재와 음악성과의 상관이 있다고 말하기엔 우리 학교 의 적지 않은 음치 아이들이 걸린다.
나는 학교 조회든 군대 제식이든 대통령 취임식이든 간에 한국 사회에서 목도하는 각종 의례들에서, 그런 연극성이 보여주는 희극성보다는 오히려 학예회 수준의 유치함, 엉성한 형식, 제대로 된 권위와 엄숙함의 부재 같은 것이 더 우습게 여겨진다. 나는 인간 세상의 연극성이 갖는 부조리함보다는 제대로 된 연극성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무능력이 더 불만스럽다. 어차피 인생은 연극이고 세상은 무대인데.
1980년 5월의 광주는 지금까지 답이 없는 물음으로 존재해왔다. 답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답을 해야 할 사람들에게 답을 할 의무와 책임을 명확하게 강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80년 5월의 광주를 소재로 한 영화는 대부분 억울한 표정을 짓거나 비통한 울음을 터트려야만 했다. 그럼으로써 1980년 5월의 광주를 기억해달라고 호소해왔다. 그런 탓에 1980년 5월의 광주를 이야기하는 영화는 영화로 즐긴다기보다는 목격해야만 하는 어떤 증거처럼 여겨졌다. 〈택시운전사〉에서도 1980년 5월의 광주는 아프게 다가온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그런 통증을 외부인의 시선을 통해 한 차례 거르는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안철수처럼 주변에서 다 뜯어말리고 아직 시기가 아니라면서 혀를 차는 와중에도 정말 무리하게 서둘러서 전면에 나섰던 정치인이 역사적으로 하나 떠오른다. 오늘 불쌍하게 끌려나온(쿨럭;) 역사적 인물은 무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즉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지도자이자 소련 건국자 되겠다. 1913년 무렵 망명지 스위스에서 레닌의 상황은 안습 그 자체였다.
문화적 고립이 두려울 뿐 신체가 늙는 것은 아무렇지 않다며 폼 잡던 인간이여, 영원히 굿바이. 나는 몸이 늙는 것도 견딜 수 없다. 럭키 서른 세븐이라 부르며 내 나이를 축복하던 여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타고난 노안은 세월이 흐르면 동안이 됩니다.' 평생 늙어 보였던 내게 꿈과 희망을 안겨줬던 전설은, 완전 거짓말이었다. 이목구비까지 없앨 작정을 한 셀카 애플리케이션으로 사진을 찍었음에도 나의 노화는 감출 수 없었다. '느껴져. 지금도 늙고 있어. 무덤으로 5센티 전진했어.' 비탄에 빠진 나는 젊음을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부분 우리 인간은 조금씩은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며, 조금씩은 못나기도 하고 조금씩은 그런대로 괜찮은 존재이다. 내가 여타의 '영웅적 서사'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 이유이다. 변혁이나 저항 등의 역사적 사건들은 사실상 소수의 '영웅'들에 의하여가 아니라, 이렇게 조금씩 못나기도 하고 이기적이기도 한 개인들이 그 '인간됨'의 모습을 가까스로 지켜내면서, 자신과 타자들에 대한 책임성을 아주 작은 귀퉁이에서 나누는 행위들에 의하여라고 나는 본다. 이 〈택시운전사〉에서 나는 그러한 '탈 영웅적 저항'의 모습들의 일면들을 볼 수 있었다.
강제적 계열 분리 같은 수단을 함부로 써서도 안 되지만, 설령 그렇게 해도 그분들이 원하는 결과, 즉 영화판의 독과점과 갑질이 해소되고 더 다양한 영화가 제작, 상영되는 행복한 세상은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오해는 하지 마시길. 나도 극장 가면 군함도만 잔뜩 걸려 있고, 한두 주만 방심하다 보면 보고 싶은 영화 다 놓치는 그런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그것과 CJ의 수직계열화와는 별 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수직계열화 덕에 그나마 다양한 영화를 보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전무후무한 고속 경제성장을 경험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이상, 꼰대짓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기성세대는 '노오력'을 통해서 삶의 질이 급격하게 좋아지는 것을 경험했고, 합리적 확률 계산에 익숙하지 않은 인간은 이때의 경험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경제학자인 저는 꼰대짓마저 수요와 공급의 틀을 통해 이해합니다. 수요공급 이론에 따르면, 꼰대짓의 거래량은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지점에서 결정됩니다. 꼰대짓의 공급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꼰대짓에 대한 수요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실제로 꼰대식 사고로 가득한 강의와 글에도 많은 사람은 공감과 존경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최저임금 인상 이슈는 "누가 최저임금 인상의 사회적 비용을 부담하는가"의 문제로 집약될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의 사회적 비용은 구조조정과 고용감소, 가격인상, 이윤감소와 투자위축, 복지비용 증대 등으로 나타난다. 사회적 비용의 형태에 따라서 부담하는 주체가 달라진다. 고용감소는 저임금노동자들이, 이윤감소는 주주나 자영업자들이, 가격인상은 소비자가, 복지비용 증가는 정부가 부담하게 된다. 최저임금 인상의 최상의 시나리오는 근로빈곤층의 소득이 고용감소를 수반하지 않으면서 증가하고, 기업, 고임금계층, 소비자, 정부가 비용을 적정하게 분담하는 경우이다.
이 영화가 '영화'로서 좋은 영화인가. 이런 답변이 있다. "옳은 주제를 지닌 영화가 옳은 것은 아니고, 옳은 생각을 하는 이의 영화가 옳은 것도 아니며, 오직 자신의 형식으로 옳다고 느껴지는 자리에 올라 있는 영화만이 옳다. 영화의 사회적 가치와 영화적 성취를 혼동한 나머지, 한 편의 영화에 자신의 사회적 정의감을 온전히 의탁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정한석 평론가) 이 주장에는 영화 '군함도'를 평가하는 일종의 기준이 들어있다. 어느 영화 혹은 문학이 좋고 안 좋고의 문제는 그 영화가 내세우는 "사회적 정의감"(항일 민족주의 등)의 유무가 아니라는 것. 영화의 좋고 나쁨은 그만의 고유한 "형식"을 통해 거둔 성취로만 평가된다는 것.
심리학자 대니얼 윌링햄은 인터넷이 있으니 암기는 필요 없다는 주장이 인간의 뇌가 컴퓨터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깔듯이 아이들에게 '사고력'을 갖추어주면 그다음에는 어떤 정보든 처리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지과학은 이런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배경지식이 없으면 비판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 창의성과 통찰력의 토대는 기억력이다(〈왜 학생들은 학교를 좋아하지 않을까?〉).
분명 박근혜는 보수주의를 표방하고 우파의 지원을 받아 민주적 절차에 따라 집권했다. 그리고 대통령 박근혜 역시 한 명의 정치인으로서 보수주의적 신념을 가질 수도 있고 또 그것을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입헌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설사 다수의 지지를 받아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헌법의 지배를 벗어날 순 없다. 박근혜가 대통령으로서 좌파에 대한 지원 축소와 우파에 대한 지원 확대라는 자신의 보수주의적 소신을 펼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헌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헌정주의의 요구이다.
청와대에선 그의 거취 문제를 논의한 적 없다는 기사가 나왔다. 탁현민이 설령 그만둔다고 해도 이 논란 때문에 그만두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분명한 메시지였다. 이에 따라 그를 옹호하는 목소리의 내용도 변했다. '사실 남자들 다 그렇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글로 쓰지 않을 뿐 대부분의 남자는 모두 하고 있다. 그의 말이 좀 저질이긴 하지만 범죄는 아니지 않나' 등의 말들이 쏟아졌다. 저 정도 발언은 한국 남성의 문화적 습속이므로 지나친 단죄는 희생양을 찾는 조리돌림이라는 주장,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지 말라는 목소리도 어김없이 나왔다.
어느 순간 애들 맛있는 거 해먹이겠다고 나는 부엌에 서있고, 애들은 아빠랑 밀린 이야기를 하는 게 부럽고 속상해서 이제 주말에도 외식하자고 했다. 또 부담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사실 어른들 말씀 중에 제일 싫었던 게 '며칠 전부터 준비했다'지 않나. 하시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하는 게 너무 싫었다. 엄마는 그렇게 음식 준비하고 그래도 안 아프다고,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고 하는데, 어떻게 안 아프겠나. 근데 그걸 똑같이 내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거다. 이런 습관을 우리 대에서 끊어야 한다. 친구들한테도 그러지 말자고 했다.
탈원전 문제를 시민과 전문가의 대립으로 몰고 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탈원전', '전문가', '시민'을 묶어서 검색해보니, '탈원전은 시민이 아니라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식의 기사가 눈에 꽤 띄더군요. 안타까웠습니다. 그렇게 분리돼선 안 되리라 여겼던 까닭입니다. 탈원전엔 과학적, 공학적, 사회경제적, 윤리적 문제 등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한 사람이 모든 문제의 전문가일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원자핵발전 전문가와 탈핵 활동가 가운데 누가 원전 없는 세상을 더 많이 상상해왔는지 헤아리면, 탈원전의 전문성이 어느 쪽에 더 있는지 따지기도 그리 간단치만은 않습니다.
핵무기는 보유함으로써 의미를 갖는 정치적 무기이지 필요하다고 쓸 수 있는 군사적 무기가 아닙니다. 김정은이 온전한 정신을 갖고 있는 한 핵무기를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한·미 양국의 대응도 여기서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100% 안보'는 없습니다. 절대안보의 추구는 창과 방패의 싸움처럼 끝없는 악순환을 초래할 뿐입니다. 안전을 추구할수록 서로 불안해지는 '안보 딜레마'의 역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