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벛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 우타노 쇼고

Originally posted at Tumblr http://bit.ly/1Isqoq2

재밌게 읽은 책들을 앞으로 하나씩 소개할까 합니다.

그 첫번째 소설은 우타노 쇼고의 “벛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입니다.

이 책은 가급적 책 내용을 설명하지 않는게 좋겠습니다. 왜냐면 읽고나서 헉! 하는 반전을 느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전이 있다 라고 얘기를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아무리 그 반전이 뭘까 라고 계속 고민하고 읽어도 절대로 알아챌 수 없습니다. “I see dead people.” 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합니다.

제 부인님은 이런 반전이 짜증난다고 했습니다. 짜증날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짜증나는 반전일까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요즘같이 더운 때에 읽기 딱 좋습니다. 초반에 진도가 조금 안나가는 부분만 잘 참고 견디시면 됩니다.

일본에서 어마어마한 상들을 휩쓸고, 우타노 쇼고란 작가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 준 작품입니다.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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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도서 추천

일반 소설이 더 재밌습니다. 하지만 과학 관련 도서는 모르는 걸 알게될 때 받는 감동 같은게 있습니다.
제가 최근 1년동안 읽은 책을 분야별로 나눠서 정리 해봅니다. 앞으로 읽어 볼 책도 같이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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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어느 오래된 집과 노인의 이야기 - '아버지의 집', 권산

얼마 전 우리나라 사람들과 유럽사람들의 중산층 기준을 비교한 보도가 이슈가 된 적이 있다. 한국사람들의 경우 30평대 아파트, 중형차, 그리고 월수입 얼마 이상인데 반해, 유럽사람들은 적어도 하나의 악기를 다룰 것, 남과 다른 요리를 할 줄 알 것, 페어플레이를 할 것 등. 설문 방식이 잘못됐다는 논란도 있었지만 그 반향은 적지 않았다.

이 얘기를 꺼낸 것은 집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들에게 집은 곧 투자의 대상이었다. 집에 관한 이야기들은 온통해  평수, 수익률, 위치 등 수량화될 수 있는 외부 척도에만 관심이 집중됐다. 건축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건축사조, 디자인,  구조 등 그 미학적 수사는 유려해도 정작 그 안, 집에 살았던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듣기 어려웠다. 고작해야 ‘무슨 집안의 어떤 벼슬을 한 누가 살았던 집’  정도?

유형자산으로써 집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집 역시도 그 역사를 논할때 다양한 관점이 있을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그 안에 누가,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너무 적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그들은 민도리집이다, 납도리집이다, 건축방식으로부터 비롯한 격식과 조선조의 신분제를 연결해보지만 권 옹은 선친이 무엇을 수리했고 그 나무는 어디에서 왔고 어느 목수의 손을 빌렸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기술과 전통을 이야기할 때 노인은 기억을 말한다. 사람들은 송석헌의 ‘겉’을 바라보고 노인은 그 집의 ‘안’에 살고 있다.” (p.130)

책 <아버지의 집>은 껍데기에 집착했던 우리의 집에 대한 시선을 내부로 돌린다. 그리고 그 안을 들여보게 한다. 건축에 대한 이론적 탐구도 아니며 삶과 주거에 관한 거창한 철학적 담론도 아니다. 단지, 오래된 집에 살다간 한 노인의 일생을 통해 우리의 삶과 전통, 그리고 그들과 공생관계를 맺어왔던 생명체와도 같은 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권산은 갑작스레 방송사 다큐멘터리에 참여하게된다. 며칠 후 전면 보수에 들어가는 경북 봉화에 있는 고택 ‘송석헌’에 관한 작업.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더 이상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담당피디의 요청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저 일로써 접근했던 오래된 집과 오래된 사람, 두 낡은 존재와의 만남은 결국 그에게 잊지 못할 인연으로 각인된다.  아직도 전통방식의 유교적 삶을 고집하는 집주인 노인 권헌조와 살아있을 때 모습 그대로 여전히 집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부인의 거처, 그리고 이젠 초로에 들어선 아들이 어릴 적 뛰놀던 앞마당까지, 집 안팎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일가一家의 역사를 권산은 바라보고 또 기록했다. 그리고 2년여에 걸친 그 기록은 노인 권헌조의 꽃상여를 따라가며 끝을 맺는다.

“세상이 주목하는 삶은 대개 엄청나게 성공한 삶과 지극히 비극적인 삶, 두 종류다. 권헌조의 삶은 지극히 조용했기에 세상이 그에게 관심을 둘 이유는 없었다. 부모님의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매일 조석곡朝夕哭 을 하고 이후로도 세상을 떠나기 전, 그의 걸음이 가능한 순간까지 아침저녁으로 산소를 성묘한 그의 삶은 기행으로 여겨졌지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일상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 주관이나 객관이라는 용어가 품은 의미보다 ‘사실’이라는 개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는 강단 유학자도 아니었고 ‘옛생각’을 지켜야 한다고 설파하고 돌아다닌 전도사도 아니었다. 권헌조는 단지 ‘그런 삶’을 살았을 뿐이다. 이것은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의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말씀이 아닌 행동이다. 이제 권헌조와 같은 행동으로 일상을 빼곡하게 매울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사라짐은 세상에서 유일했던 절대 소수 가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이별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것에 화가 났을 것이다.” (p.317)

노인은 말수가 적은 분이었다. 아니 거의 없었다. 권산의 표현을 빌자면, 좌중을 말의 ‘양’이 아닌 ‘질’로 집중시킬 수 있는 분이었다. 노인은 다큐멘터리 촬영기간에 입원을 했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고택 송석헌이 호흡을 멈춤과 동시에 노인도 함께 숨을 거뒀다. 새로 단장할 고택의 겉모습은 깔끔히 변해 관광객을 맞이하겠지만, 당신의 집으로써 함께 했던 그 생명력은 이미 끝났음을 직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노인 권헌조의 죽음은 한 자연인의 죽음이 아닌, 한 시대의 죽음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한때나마 우리와 익숙했던 떠나가는 시대의 뒷모습을 보는 것은, 슬프다. 그리고 그 슬픔은 더 이상 우리에게 그런 집이 허락되지 않을 거란 예감에 배가된다. 이제는 ‘송석헌’과 같은 그 이름들조차 잃어버린, 켜켜이 기억의 나이테를 쌓아가며 아버지와 아들을 이어 내려가는 그런 집 말이다.

등장인물의 말도, 글쓴이의 말도 그렇게 많지 않은 책이다. 그래서 글과 사진사이의 여백은 더욱 커 보인다.하지만 그럼에도 그 울림은 깊고 넓다. 지나치게 형식화된 세상 틀이 갑갑할 때,한번쯤 펼쳐보길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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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자네 인생을 살게나" -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윔블던에 있을 때 나는 나무로 된 좁디 좁은 도서관 개인열람 부스에서 일하기도 하고 식사를 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그런데 유난히 정신없던 어느 날, 기자들이 떼를 지어 안드레 애거시와 그의 유명한 여자 친구 브룩 쉴즈를 쫓아다니는 통에 나는 그만 어떤 영국 사진 기자에게 떠밀려 넘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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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희망은 꿈꾸는 자의 것 - '달과 6펜스' , 서머셋 모옴

영국의 주식브로커로 일하던 찰스 스트릭랜드는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느닷없이 화가가 되기로 한다. 안정된 현실과 타협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가족과 일 모두를 버리고 파리로 떠난다. 그곳에서 화가로써의 초기 열정을 불태우던 그는 남은 예술가로써의 삶을 남태평양 타히티섬에서 바치기로 한다. 물질적으로 비루했어도 예술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뜨거운 삶을 살았던 그는 그 섬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완성하는 희열을 맛본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는 최후를 맞이한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소설은 후기인상파 화가 폴 고갱을 소재로 했다.

얼핏 한 위대한 예술가의 생에 대한 찬미를 담은 작품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을 주로 관통하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과 그 욕망을 억압하는 현실간의 극명한 대비다. 제목에서도 암시하듯, 꿈과 영혼의 이상을 추구하는 세계가 ‘달’의 세계라면, 물질적이며 세속적인 ‘6펜스’의 세계가 그 대척점에 존재한다는 것. 아울러 ‘6펜스’의 세계는 탈피하고 싶은 위선적이고 천박한 세계를 의미한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스트릭랜드가 보여주듯 기존의 가치체계를 훌훌 벗어 던지고 영혼의 울림만을 좇는다는 것이 쉬운 일일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운 질문이다. 왜냐하면, 현실의 장벽을 뛰어넘지 못하도록, 그래서 더욱 더 사회적으로 견고하게 구속되도록 우리들 스스로가 방어적인 논리를 심어놓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양심’의 문제이다.​

“ 나는, 양심이란 인간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 속의 파수꾼이라고 본다…(중략)..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 사슬이 된다.” – 본문,p.77​

이러한 고착화된 인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본능의 목소리에 충실했던 인물들이 작품 속에서 겪어야 했던 대가는 혹독하다. 예술혼을 추구하는 화가 스트릭랜드는 온몸이 썩어가는 문둥병의 벌을 받아야 했으며, 사랑을 좇던 여인 블란치는 목이 타버리는 고통 속에 생을 마쳤다. 벅찬 자유의 느낌을 만끽했던 의사 아브라함은 부와 명예를 그 자유의 댓가로 내놓아야 했다.​

하지만 소설은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삶이 불행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임을 암시한다. 이들이 겪은 대가가 ‘혹독’하다고 한 것은 인습에 얽매인 물질적인 눈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얘기일 뿐이다. 문둥병으로 인해 시력마저 잃은 스트릭랜드였지만 그는 영혼의 눈을 통해 영원한 시간과 공간을 얻었다. 사랑이라는 본능적 감정에 충실한 여인 블란치는 생이 끝나는 시점까지 자신의 선택에 당당할 수 있었으며,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정착한 의사 아브라함은 물질적 풍요 대신 평생 후회하지 않는 행복한 삶을 선물로 받았다.

‘달’과 ‘6펜스’ – 이 둘의 세계는 스트릭랜드의 그림 속 색채만큼이나 대비가 뚜렷하다. 그리고 두 세계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한없이 멀어 보인다. 하지만 그 거리는 좁혀질 수 있다. 바로 우리와 달과의 사이에 짙게 낀 ‘6펜스’라는 현실의 먼지를 걷어 치울 때다. 달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를 향해 미소 지을 지 모른다.

희망은 꿈꾸는 자의 것. 다시 한번 본능의 가슴 뜀을 확인하고픈 모든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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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주위를 돌아보라 -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는 예순 살의 나이로 문단에 데뷔, 조국 포르투갈에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의 대표작이다. 역사적 사건의 재해석이나 인간의 윤리의식에 관한 작품을 주로 쓴 작가는 이 소설에서 특히 도덕적으로 파괴되어 가는 현대인의 무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는 교통신호를 기다리다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 한 남자로부터 시작한다. 환하긴 하지만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이른바 ‘백색실명’의 이 불가사의한 전염병은 순식간에 모든 사회를 뒤덮는다.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은 처음으로 눈먼 사람을 치료했던 안과의사의 아내. 축복이라기보다는, 눈먼 자들의 고통을 생생히 목도해야 하는 또 다른 형벌을 받은 것과 다름없다. 정부당국에 의해 옛 정신병원 건물에 격리 수용된 그들은 그곳에서 잔혹한 인간성 파괴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수용소를 감시하는 군인들의 폭력과 냉소, 수용자들간에 팽배한 이기주의와 탐욕, 그리고 마침내 살인과 집단강간마저 횡행하는, 윤리와 도덕의 부재상황에서 그들은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도전 받는다. 결국 수용소를 탈출하지만 이들 앞에는 더욱 거대한 대도시의 참혹함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 작품은 우리에게 ‘보지 못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 단지 시력의 상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닌, 살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굶주림 때문에 성적 폭력에 굴복해야 하며, 눈이 먼 상황에서도 권력구조를 숭배하는 인간성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그저 냄새와 소리로써만이 상대방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세상은 동물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문명적 인간관계의 매개체인 ‘이름’이란 것 역시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도덕과 합리라는 보호막은 완전 해체되어 원시사회의 야만성으로 후퇴해버렸기 때문이다.

한쪽 눈을 잃어 안대를 한 노인에게 눈먼 안과의사가 왜 유리 눈을 끼워 넣지 않느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보기에도 좋고 위생적으로 좋은 가짜 눈 말이다. 이에 노인은 반문한다. “그들이 지금 유리 눈알 두 개를 끼고 돌아다니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중략) 그리고 위생 얘긴데, 이보시오, 의사 선생, 이런 곳에서 어떤 위생을 바란단 말이오.” (p.180). 앞을 보지 못하는 세상에서는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더 이상 의미 없음을 역설하는 대목이다. 위생적인 면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 역시 마찬가지. 도덕적인 깨끗함과 더러움의 차이가 사라진, 보지 못하는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오직 도덕적 타락 뿐이다.

결국 작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관계의 회복을 강조한다. 작품 속 그들이 흑색실명이 아닌 백색실명이었다는 점도 그런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우유처럼 하얀 상태와 달리 깜깜한 어둠으로 떨어지는 흑색실명은 완전한 실명을 의미한다. 시력이 돌아오기 시작할 무렵 첫 번째로 눈 먼 남자가 커다란 공포로 몸을 떠는데, 이는 백색실명에서 흑색실명상태로 옮겨가게 되는 두려움 때문이다. 어차피 앞이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인데 무엇이 더 두렵다는 걸까. 이는 역으로 지금까지 그들의 실명이 완전한 실명이 아닌 환한 빛의 실명상태였던 점을 새삼 환기시킨다. ‘볼 수 없었음’이 아니라 ‘보지 않았음’을, 그래서 언젠가 다시 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의 여지가 있는 실명인 것이다.

이 작품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바닥까지 타락한 인간군상이 시각과 더불어 후각적으로 생생히 전해지는 현장을 지켜보는 것이 우선 편하지 않다. 메타포들로 겹겹이 쌓인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음은 물론, 따옴표 등 문장부호 없이 직간접화법 구분도 되지 않는 문체의 형식은 더욱 깊은 집중도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흡인력이 강하다. 현대사회에 대한 거창한 문제의식이 아니더라도, 그저 주위를 둘러보라는, 그래서 그들과의 유대관계를 회복하라는 소탈한 메시지가 그 어떤 작품보다 더 파괴적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2008년,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해서 많은 화제를 낳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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