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는 여전히 주먹을 쥐고, 누구는 손을 잡고, 누구는 가만히 서서 각자 다른 모습으로 함께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 투사가 되지는 못했고, 때론 비겁하게 살았을지라도, 내 삶을 지키는 데 급급해 눈 감은 적은 있을지라도, 그렇게 살다 문득, 그래도 함께 겪은 시대의 고통을 영 외면하지는 못한 평범한 사람들의 서사. 그런 이들이 촛불을 들었고 그 힘으로 5월의 정신을 계승한 정부를 만들었다.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어낸 동료시민들이기에 가질 수 있는 뿌듯함. 오늘 함께 운 사람들의 가슴에는 기쁨의 서사 하나가 새로 만들어진 셈이다.
문재인 정부의 여성할당 공약에 공기업들이 볼멘소리를 내뱉는다. "샅샅이 뒤져도 대상자가 없다"고 말한다. 아주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닐 수 있다. 공기업이나 대기업들은 소위 '승진코스'란 게 존재한다. 임원은 한 업무만 파악해서 일처리를 할 수 없기에 순환보직을 돌고 여러 업무를 파악한다. 소위 이 코스를 밟아야만 임원의 '후보'가 될 자격을 얻는다. 명시적인 것은 없을 테지만 암묵적으로 존재한다.
피닉스는 대한민국 두 번째 여성 헬기 조종사 피우진 중령의 호출명이다. 그녀는 유방암 수술을 받았고, 헬기조종사로서 중요한 균형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암이 전이되지 않은 나머지 한쪽 가슴도 적출하였다. 하지만 군 당국은 그녀를 전역처분 즉 해고나 다름없이 쫓아냈고, 인권연대의 도움으로 소송을 내면서 불의에 맞서 싸워 복직하였다. 그녀는 복직 후 대령으로 승진하지 못해 계급정년으로 전역을 하게 되었다.
요즘 바다 건너 미국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배터리 이론'이 화제다. 뉴요커는 트럼프 대통령이 "사람의 몸은 한정된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나는 배터리와 같다"고 주장한 인터뷰를 공개했다. 그는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골프 외에는 운동을 하지 않는다고도 전했다. "사람의 몸은 재충전할 수 없는 배터리와 같다. 운동을 할수록 빨리 죽게 된다"는 것이 트럼프의 건강철학이다.
이미 대선 과정에서 수없이 지적되었다. 문재인 캠프는 대체 '10조 추경'을 통해 어떤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지 구체적인 내역을 밝힌 바 없다. 서서히 그 전모가 드러나는 것은 반가운 일인데, 그것이 '옥상옥' 조직이 될 우려가 큰 온갖 '위원회' 만들기에 투입된다면? 그러한 예산 편성과 집행이 '중년 공직자 배불리기'의 일환일 뿐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있을까?
최근 북한을 제대로 보기 위해 필요한 키워드는 다음의 세가지다. 첫째, 『뉴욕타임즈』가 북한 정권의 행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합리적 광기'(Rational irrationality)라는 개념이다. 김정은을 폭정군주로 다루는 광인(mad man)이론보다는, 북한 정권이 자기 이익을 정확하게 이해할 능력이 있고 심지어 무모해 보이는 도발마저도 상대방과의 협상을 위해 의도적으로 무기화하고 있을 만큼 북한의 정책 결정 과정은 합리적이라고 보는 이 개념을 대북 인식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음은 '예측 가능한 예측 불가능성'(predictable unpredictability)이다.
법인의 한 해 예산이 78만원밖에 안 될 정도로 가난해서 못 냈다는 오해도 있었는데 이 역시 학교회계와 법인회계를 오해한 것이다. 학교가 한 해 78만원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다. 학교회계는 대부분 국가 돈으로 운영된다. 한 해 78만원이라는 건 법인의 수익용 재산에서 얻은 수익이 한 해 78만원이라는 것인데, 이건 좋은 일이 아니다. 수익용 재산이란 이를 통해 세금과 법정부담금 정도는 낼 정도의 수익을 얻어야 한다. 그 정도의 수익은 얻는다는 걸 전제로 사학재단에 학교운영비의 대부분을 지원하면서도 인사권과 계약권을 주는 것이고, 사학재단은 이런 의무가 있음을 알고서 재단을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문 대통령의 파격적인 모습은 한국 정치의 병폐가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니라는 걸 몸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 권위주의 청와대, 군림하는 청와대의 상징으로 지목되고 있는 '대통령 이외 사람의 청와대 내 이름표 패용'이다. 나는 이것은 대통령 의지로 금세 고칠 수 있다고 본다. 왜 누구나 다 아는 비서진, 각료 등이 청와대에 들어가면 이름표를 달아야 하나? 이것은 미국, 일본 등 어느 민주국가에도 없는 관행이다. 빨리 개선하길 기대한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일주일, 사방이 소란하다. 벌써부터 어떤 단체들은 지난 정부가 결정하거나 행한 정책들의 시행을 막기 위해 집회를 열고,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다급한 현안이 조금이라도 더 새 정부의 정책 우선순위에 반영되기를 바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누군가는 조사를 요구하고 누군가는 입법을 요구하고 또 누군가는 이제 갓 일주일 된 정부에 공약을 지키라고 벌써부터 닦달이다. 이런 소란함이 불편한가?
돌아가신 분이 누구인지 왜 그날 거기에 있었는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우리 모두가 그였을 수 있었음을 깨닫고 아파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처음으로 깨어난 이들도 많았습니다. 우리 정말 많이 참고 살았구나, 이거 진짜 거지 같구나, 이렇게 같이 공유하는 수많은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여성들이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예능에서는 아직도 여성의 외모가 주된 유머 소비거리이고, 여성 비하는 아직도 쏟아집니다. 대학교의 대자보는 찢겨나가고 성폭행을 고소한 이들은 무고죄로 형을 선고받습니다. 대학생들의 단톡방에서는 여전히 성희롱이 넘쳐납니다.
커밍아웃 후 1년 반 만에 처음으로 아이와 둘이서 여행을 다녀왔다. 길을 가다가 호기심에 가득 찬 주위의 시선에 태연한 척 해보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아이도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시하다가도 한 번씩 짜증을 내곤 한다. 아이가 평생토록 주위의 불편한 시선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하다가도 '엄마인 내가 괜찮다는데 무슨 상관이냐. 내 아이는 내가 지킨다.' 하며 속으로 되뇌곤 했다.
지금 영화관은 거꾸로 가는 것 같다. 최상의 상영 조건보다는 관리와 운영의 편의가 더 중요해졌고 모든 게 점점 유원지스러워지고 있다. 심지어 요새는 뻔뻔스럽게 떡볶이를 파는 체인점까지 생겼는데, 정말로 그걸 사들고 오는 관객이 내 옆자리에 앉을까봐 벌써부터 두렵다. 영화제를 가는 것도 이전만큼 즐겁지 않은데, 상영관의 전반적인 질적 하락 속에서 영화에 맞는 상영관을 선택하는 것은 거의 복권 당첨에 가깝기 때문이다.
공격의 방식과 총량은 상호간에 어느 정도 비슷해야 한다. 한쪽에서 확성기로 욕을 했다고 해서 한쪽에서 총을 쏘면 안 되는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어서 하는 저주와 비난은, 욕보다는 총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과잉 윤리'가 '비윤리'보다 더 악하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무리 안의 '배신자'로 추정되는 이들에 대한 린치는 언제나 적에 대한 공격보다 더 가혹했다. 그들에 대한 윤리적 미움과, 바로잡겠다는 욕망이 그 명분을 주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래 왔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을 새 시대의 첫째가 되고 싶었으나 구시대의 막내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탄했다. 그렇다면 '구시대'는 노무현 정권이 마무리했는가? 실제 노무현 정권의 뒤를 이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구시대를 더 심각하게 연장시켰다. 그래서 노무현의 임무는 다시 문재인 정권으로 넘어왔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구시대'와 '새 시대'의 내용이 약간 변했고, 문재인 정권은 더 이상 구시대의 막내 역할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뉴스에서 내게 신선하게 다가온 것 중의 하나는 대통령이 초등학생과 대화하는 어투였다. 대통령은 미세먼지에 대한 경험을 열심히 이야기하는 한 학생의 이야기를 경청한 후, 그 학생에게 "미세먼지 걱정 때문에 바깥에서 놀기도 걱정되고, 바깥에서 수업도 걱정되고 그렇죠. 그 이야기를 하는 거죠?"라고 응답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대통령'이 작은 초등학생에게 그 흔한 '반말'이 아닌 '존댓말'을 하면서 그 아이와 '평등한 인간'으로서의 몸짓, 눈빛, 그리고 언어를 전하고 있다는 것 - 내게는 참으로 신선한,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빵을 나누는 문제는 역시 전세계의 고민거리다. 개인소득의 불평등도 심각한 문제지만 최근에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분배가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 노동소득분배율이 하락하기 시작하여 2000년대 들어 급속히 낮아졌고, 다른 국가들도 이와 비슷하다. 노동생산성 상승에 비해 실질임금 상승이 낮아서 국민소득에서 노동자들의 몫이 줄어들었고 기업에 비해 가계가 상대적으로 가난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경제학계에 수수께끼와도 같은 일이라 이제 학자들은 머리를 짜내어 여러 설명을 내놓고 있다.
항문성교를 한 군인이 내심 '싫다'는 점만으로 그 군인을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도 되는 것인가? 항문성교를 한 군인을 찾아내기 위하여 국가(군검찰, 군사법원)가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해가면서 수사를 해도 되는 것인가? 더구나 지금 벌어지는 것처럼 그 군인에 대해 구속 수사를 해도 되는 것인가? 국가가 나서서 누군가를 수사하고 형사 처벌하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가능한데, 왜 이 경우가 그런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는지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합의 하에 한 항문성교로 인하여 '침해되는 법익'은 없고, 단지 '기분 나쁨'은 형법에서 보호되는 법익이 아니다.
과연 서울로 7017이 뉴욕의 하이라인파크처럼 될 수 있겠느냐는 불안감이 있던 와중에 최근 서울역 앞을 지나다가 10톤 분량은 되어 보이는 신발들이 서울로 7017과 서울역284 건물 앞을 걸쳐 음산하게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이 끔찍한 조형물이 왜 서울로 7017과 서울역 광장을 점유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 서울시 홈페이지를 뒤져봤다. 서울로 7017과 관련된 키워드로 열람 가능한 자료를 몇 개 살펴보니 이 조형물의 제목이 슈즈트리(Shoes Tree)임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