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의 한 해 예산이 78만원밖에 안 될 정도로 가난해서 못 냈다는 오해도 있었는데 이 역시 학교회계와 법인회계를 오해한 것이다. 학교가 한 해 78만원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다. 학교회계는 대부분 국가 돈으로 운영된다. 한 해 78만원이라는 건 법인의 수익용 재산에서 얻은 수익이 한 해 78만원이라는 것인데, 이건 좋은 일이 아니다. 수익용 재산이란 이를 통해 세금과 법정부담금 정도는 낼 정도의 수익을 얻어야 한다. 그 정도의 수익은 얻는다는 걸 전제로 사학재단에 학교운영비의 대부분을 지원하면서도 인사권과 계약권을 주는 것이고, 사학재단은 이런 의무가 있음을 알고서 재단을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분이 누구인지 왜 그날 거기에 있었는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우리 모두가 그였을 수 있었음을 깨닫고 아파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처음으로 깨어난 이들도 많았습니다. 우리 정말 많이 참고 살았구나, 이거 진짜 거지 같구나, 이렇게 같이 공유하는 수많은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여성들이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예능에서는 아직도 여성의 외모가 주된 유머 소비거리이고, 여성 비하는 아직도 쏟아집니다. 대학교의 대자보는 찢겨나가고 성폭행을 고소한 이들은 무고죄로 형을 선고받습니다. 대학생들의 단톡방에서는 여전히 성희롱이 넘쳐납니다.
커밍아웃 후 1년 반 만에 처음으로 아이와 둘이서 여행을 다녀왔다. 길을 가다가 호기심에 가득 찬 주위의 시선에 태연한 척 해보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아이도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시하다가도 한 번씩 짜증을 내곤 한다. 아이가 평생토록 주위의 불편한 시선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하다가도 '엄마인 내가 괜찮다는데 무슨 상관이냐. 내 아이는 내가 지킨다.' 하며 속으로 되뇌곤 했다.
지금 영화관은 거꾸로 가는 것 같다. 최상의 상영 조건보다는 관리와 운영의 편의가 더 중요해졌고 모든 게 점점 유원지스러워지고 있다. 심지어 요새는 뻔뻔스럽게 떡볶이를 파는 체인점까지 생겼는데, 정말로 그걸 사들고 오는 관객이 내 옆자리에 앉을까봐 벌써부터 두렵다. 영화제를 가는 것도 이전만큼 즐겁지 않은데, 상영관의 전반적인 질적 하락 속에서 영화에 맞는 상영관을 선택하는 것은 거의 복권 당첨에 가깝기 때문이다.
공격의 방식과 총량은 상호간에 어느 정도 비슷해야 한다. 한쪽에서 확성기로 욕을 했다고 해서 한쪽에서 총을 쏘면 안 되는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어서 하는 저주와 비난은, 욕보다는 총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과잉 윤리'가 '비윤리'보다 더 악하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무리 안의 '배신자'로 추정되는 이들에 대한 린치는 언제나 적에 대한 공격보다 더 가혹했다. 그들에 대한 윤리적 미움과, 바로잡겠다는 욕망이 그 명분을 주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래 왔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을 새 시대의 첫째가 되고 싶었으나 구시대의 막내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탄했다. 그렇다면 '구시대'는 노무현 정권이 마무리했는가? 실제 노무현 정권의 뒤를 이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구시대를 더 심각하게 연장시켰다. 그래서 노무현의 임무는 다시 문재인 정권으로 넘어왔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구시대'와 '새 시대'의 내용이 약간 변했고, 문재인 정권은 더 이상 구시대의 막내 역할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뉴스에서 내게 신선하게 다가온 것 중의 하나는 대통령이 초등학생과 대화하는 어투였다. 대통령은 미세먼지에 대한 경험을 열심히 이야기하는 한 학생의 이야기를 경청한 후, 그 학생에게 "미세먼지 걱정 때문에 바깥에서 놀기도 걱정되고, 바깥에서 수업도 걱정되고 그렇죠. 그 이야기를 하는 거죠?"라고 응답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대통령'이 작은 초등학생에게 그 흔한 '반말'이 아닌 '존댓말'을 하면서 그 아이와 '평등한 인간'으로서의 몸짓, 눈빛, 그리고 언어를 전하고 있다는 것 - 내게는 참으로 신선한,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빵을 나누는 문제는 역시 전세계의 고민거리다. 개인소득의 불평등도 심각한 문제지만 최근에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분배가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 노동소득분배율이 하락하기 시작하여 2000년대 들어 급속히 낮아졌고, 다른 국가들도 이와 비슷하다. 노동생산성 상승에 비해 실질임금 상승이 낮아서 국민소득에서 노동자들의 몫이 줄어들었고 기업에 비해 가계가 상대적으로 가난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경제학계에 수수께끼와도 같은 일이라 이제 학자들은 머리를 짜내어 여러 설명을 내놓고 있다.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PL(People Living with HIV/AIDS 의 약자로 감염인을 지칭한다)은 모두 무언가를 원망해 보았을 것이고, 자신 또한 원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 과정은 단순하지 않다. 원망의 대상 또한 상대, 나 자신, 그리고 사회 모두가 될 수 있다. 나에게 본인의 질병을 숨긴 상대, 이 질병에 대해서 몰랐고 조심하지 않은 나, 그리고 이러한 준비에 아무것도 돕지 않은 사회에 대한 것이다. HIV/AIDS는 서로가 원해서, 서로의 몸에 침투하여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품고 표출했던 상대에게 책임을 묻는 유례없는 질병이다. '우리 문제'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도, 감염경로와 치료방법이 확실해진 상황에서 비합리적인 공포를 가지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포퓰리즘도 필요하고, 제도화도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포퓰리즘이 단지 포퓰리즘에 머물지 말고 제도화를 견인한고 압박하는 노릇을 해야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제도화가 주가 되고 포퓰리즘은 종이 되며, 제도화가 목적이고 포퓰리즘이 수단이 되야 한다는 말이다. 지도자 한 사람이 바뀌어도 사회 공기기 엄청나게 바뀐다는 걸 실감하는 나날이지만, 지도자 한 사람만 바뀌고 그 사회를 조직, 운영하는 체계가 그대로 잔존한다면 진정한 사회의 진전을 이룰 수 없다. 지금 우리는 그런 걸 잘 관찰할 수 있는 역사적인 지점에 서 있다.
항문성교를 한 군인이 내심 '싫다'는 점만으로 그 군인을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도 되는 것인가? 항문성교를 한 군인을 찾아내기 위하여 국가(군검찰, 군사법원)가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해가면서 수사를 해도 되는 것인가? 더구나 지금 벌어지는 것처럼 그 군인에 대해 구속 수사를 해도 되는 것인가? 국가가 나서서 누군가를 수사하고 형사 처벌하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가능한데, 왜 이 경우가 그런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는지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합의 하에 한 항문성교로 인하여 '침해되는 법익'은 없고, 단지 '기분 나쁨'은 형법에서 보호되는 법익이 아니다.
1991년 4월 26일, 시위에 참가한 한 학생이 전투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학생은 바로 명지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강경대였다. 강경대의 죽음은 내가 어떻게든 버텨보려던 군 복무의 당위성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우리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라는 객관적 사실은 당시 내가 해야만 했던 전투경찰의 임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굳어지게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시청에서 시위 진압 대비 근무를 서다 그곳을 나와 강경대 타살사건 대책위원회가 있던 연세대학교로 가서 양심선언을 했다.
누구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고,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도 똑같이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권 차원의 문제라고 주장한다면, 노조의 기본권이 파괴된 상황에도 문제의식을 가지는 게 일관되다. 갑을오토텍은 부당노동행위, 파업방해, 노조원 폭행, 노조파괴 등 노동조합과 노동자의 헌법상 기본권을, 매우 공격적인 방식으로 무력화시킨 노동기본권 파괴의 백화점 같은 사업장이다. 변호인으로서 조력받을 권리를 옹호한 기본권 보장차원의 행위니 문제없다고 방어하려면 이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기본권을 대하는 일관되고 올바른 태도다.
과연 서울로 7017이 뉴욕의 하이라인파크처럼 될 수 있겠느냐는 불안감이 있던 와중에 최근 서울역 앞을 지나다가 10톤 분량은 되어 보이는 신발들이 서울로 7017과 서울역284 건물 앞을 걸쳐 음산하게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이 끔찍한 조형물이 왜 서울로 7017과 서울역 광장을 점유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 서울시 홈페이지를 뒤져봤다. 서울로 7017과 관련된 키워드로 열람 가능한 자료를 몇 개 살펴보니 이 조형물의 제목이 슈즈트리(Shoes Tree)임을 알 수 있었다.
검찰은 노동자들을 업무방해죄로 기소하였고, 법원은 업무방해죄의 유죄 판결을 내렸다. 심지어 노조위원장에게는 실형을 선고했다. 또한 사측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이유로 노동자들의 재산에 가압류 인용 결정을 내렸다. 동양시멘트, 정확하게는 동양시멘트가 만든 SPC는 노조와 조합원들을 상대로 50억 원의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제기했다. 피고가 된 노조와 조합원들을 대리하여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기록을 보면 볼수록 억울하고 참담하다. 현실에서는 누가 잘못했는지가 분명하다. 그런데도 법 앞에서 이들은 마냥 죄인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지금 노무현 정권 시기를 돌아보면 실패의 기억보다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속에서 벌어졌던 그 사람(들)의 뜨거운 고투의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는다. 나이가 들수록 과학적 전망이나 역사적 당위 같은 사람 바깥에서 안으로 이입되는 차가운 언어보다 분노, 슬픔, 공감, 회한 같은, 사람 안에서 끓어올라 밖으로 번지는 뜨거운 정념의 언어들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아마도 그것이 그날 내가 고민 끝에 5번이 아닌 1번을 찍게 된 진짜 이유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문재인에게, 노무현의 친구인 그에게 한번 다시 해보라고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문재인이라는 바보같이 착하기만 해 보이는 사람의 속에 사실은 비수처럼 시퍼렇게 박혀 있으리라 짐작되는 그 깊고 뜨거운 정념과, 그 정념을 이기지 못해 어눌하고 더듬더듬한 발성으로밖에 나오지 못하는 그 낡고 변변치 못한 수사학이 지닌 가능성에 한 표를 기꺼이 던졌던 것이다.
조국 교수를 민정수석으로 임명함으로써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개혁'의 의지를 만천하에 천명한 셈이다. 문재인 정부가 검찰개혁의 의지가 높다는 것을 모르는 국민들은 없다. 그걸 모르는 검찰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정서적 반감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정서적 반감을 최소화할 수 있는 '명분'을 이쪽이 제공해줘야 한다. 반대파의 최소화를 위해, 보수적 방법을 채택하되, 실제로는 진보개혁적 성과를 내는 것. 바로 이 지점이 김대중 대통령이 보여주었던 '정치력'의 진짜 핵심이었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는 민주정부 3기이다. '기분 좋고 섹시한' 내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성공하는' 민주정부를 만드는 것이다.
나는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노무현이 부동산 투기와 정면대결하면서 참여정부 당시 부동산 투기의 진앙 역할을 하던 강남을 특정해 "강남이 불패면 대통령도 불패다"라고 기염을 토하던 장면을.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노무현과는 다른 발언을 했으면 좋겠다. 예컨대 "여러분들이 대한민국을 모든 면에서 리드하시는 분들이 아니냐? 짜증나고 억울하신 면이 있더라도 대한민국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여러분들이 지금보다 더 많은 책임을 져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같은 식의 발언 말이다.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말하면 강남부자들의 마음도 좀 누그러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