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이유로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무리 권리의 평등화가 진행된다 해도 인간이 가진 "특징의 차이"는 사라질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패전 직후인 1947년에 제도화된 생리휴가는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례가 없는 일본 특유의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에도 "남성이 차가운 눈으로 본다" "동료에게 폐가 된다" 등 다양한 이유로 현실에서는 생리휴가를 사용하기 어렵다.
그가 유교적 여성관의 특징이라고 지적하는 사항들은 너무나 크고 광범위해서, 그냥 우리가 "여성혐오"라고 부르는 것들의 사례를 모아놓은 것과 차이가 없다. 여성주의 및 여성혐오에 관해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항의 대부분이 특별히 "유교적"이라기보단 대부분의 남성중심적 문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다른 문화권 혹은 다른 포르노 문화의 여성관과 "유교적" 여성관의 유의미한 차이를 짚어내지 않는 한 필자가 주장하는 "유교적 여성관"이 딱히 유교적일 이유도, 따라서 K-POP이 딱히 "신유교주의적 포르노"일 이유도 없다.
이번 탄핵으로 우리네 삶에 장막같이 드리워져 있던 박정희의 그림자를 비로소 거두게 되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선뜻 동의할 수가 없다. 우리의 정신 어딘가 한 구석에는 그 딸의 집 문앞에 와서까지 무릎 꿇고 있는 저 여성의 형상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어대며 이 모처럼의 작은 승리의 국면을 대놓고 능멸하는 저 무도하기 짝이 없는 10%가 기대고 있는 근거가 사실 우리 자신들 속에 끈질기게 남아있는 바로 그 어두운 형상이라고 한다면?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니, (구)새정치민주연합의 분당이 누구 탓이냐의 문제, 당시 무슨 '혁신'을 했느냐는 비판이 튀어 나온다. '김상곤 혁신위'의 일원이었던 사람으로 한 마디는 해야겠다. 안철수의 탈당 원인이 '김상곤 혁신안'이 부족하기 때문이었을까? '김상곤 혁신안'과 매 '혁신안' 발표 직후 발표된 '안철수표 혁신안'은 공통점이 80% 이상이었다. 나는 안철수가 '혁신위' 활동 기간 중 또는 그 이전에 대권 도전을 위해서는 자신만의 '군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만든 당을 깨고 새로운 당을 만들기로 결단했다고 보고 있다. 본디 권력의지는 법규를 뛰어 넘는 법이다.
정규직이 가진 금융 접근의 용이함은 정규직이 가진 특권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지만 정작 본인들은 이것을 특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원래 특권이란 것은 누리는 사람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임을 감안한다면 딱히 새로울 것도 없긴 하다. 대기업 정규직은 전체 노동자 중에서 소수에 불과하다. 여신이 필요한 사람 중 다수는 은행을 이용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들은 저축은행을 찾아가고 대부업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풍족한 은행여신과 한도를 누리는 정규직들은 여기에서 화살을 대부업체와 대부업체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돌린다. '왜 그런 비싼 곳을 이용하느냐?'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접근성 이슈가 부각되면서 어플리케이션 중에 시각장애인들의 사용환경을 고려한 것들도 종종 출시되고 있는데 이마저도 업데이트와 함께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연락되던 친구들은 메신저 업데이트와 함께 연락이 두절되어 버린 나의 행방을 걱정해야만 했고 배달 어플의 업데이트는 자취하는 시각장애인들의 야식선택권을 한 순간에 빼앗아가 버렸다.
한국이 한때 사드 배치에 대해서는 중국 입장을 고려하며 "제안도 없었고, 검토도 하지 않으며 협의조차 없다"고 발을 뺐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세 번의 한·중 정상회담에서 "사드는 고려하지 않겠다"고 시진핑 주석에게 약속했습니다. 이렇게 해 놓고 어느 날 갑자기 중국과 한 마디 양해도 없이 배치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중국은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괘씸한 한국을 반드시 응징하겠다고 합니다.
다 읽고 방치한 책들은 꽉 찬 책장에 자리 잡지 못하고 바닥과 책상, 침대에 켜켜이 쌓여 사나운 기둥이 된다. 그래도 나는 책을 계속 사들이고 있다. 흥미로운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괴로워서 뒹굴거리다 유혹에 항복한다. 고뇌와 지름의 과정을 관찰하여 결론 내건대, 나는 독서가가 아닌 귀 얇은 소비자에 가깝다. 책들과 통장을 학대하고 있다. 죄책감으로 심란한 마음을 달랜답시고 정리정돈 기술에 관한 책을 사서 책 기둥의 키만 키우는 어리석음이라니.
우리 몸이 제 기능을 유지되기 위해 매일 사용되는 에너지의 양을 기초대사량(BMR)이라고 하는데, 기초대사량은 성인이 된 이후에는 10년마다 1~2%씩 줄어들게 된다. 기초대사량은 나이, 키, 체중에 따라 다르게 계산된다. 20살을 기준으로 170cm/60kg의 남자는 약 1600kcal, 160cm/45kg의 여자는 약 1350kcal이 기초대사량이 되는데 2%로 계산하면 30살이 됐을 때 남자는 32kcal, 여자는 27kcal의 에너지를 적게 쓰게 된다.
대다수의 여성 관련정책들은 여전히 논란 중이며, 그 실행을 위해서는 만만찮은 반대를 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그 한 예가 지난 13일 문재인캠프에서 여성운동가로 알려진 남인순 의원을 여성본부장으로 영입하자,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환영했던 지지자들 중에서도 성폭력 관련 법안이나 군대 관련 발언 등 남 의원의 전력을 문제 삼은 일이다. 여성표 얼마 얻으려다가 더 많은 표를 잃을 것이라며 지지를 철회하겠다는 협박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여성운동가 출신을 내각도 아닌 캠프에 합류시킨 것만으로도 논란이 일어날 만큼 지금 한국의 젠더갈등은 첨예하다.
그림을 보고 많은 분들이 충격을 받았나 보다. 하기야 호텔을 예약했다가 취소하는 무책임한 행동만으로도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니 이 무슨 허경영 축지법 같은 소린가? 하지만, 조리돌림용 죽창부터 찾게 되는 반사신경을 애써 누르고 잘 생각해 본다면 이 그림을 통해 거시경제학의 가장 오랜 논란을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만약 내 강의를 듣는 학생이 이 그림을 들고 왔다면 나는 한없이 자애로운 표정이 되어서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이네요. 열의가 훌륭합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만약에 이 학생이 영어도 좀 해서 바다 건너 크루그먼 선생께 이메일을 보냈다면 선생 역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혁명은 아름답고 승리는 달콤하지만, 그 열매가 곧바로 시민들의 손에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역사는 말해 준다. 젊은 학생들의 목숨과 바꾸어 독재자를 몰아낸 4·19 이후 박정희의 쿠데타가 일어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80년 광주에서 우리는 군부독재의 연장을 막기 위한 유례없는 민주화의 열망과 희생을 목도했으나, 그들은 전두환의 집권을 막지 못했다. 87년 민주화의 결말은 노태우 정부의 출범과 3당 합당이었다. 시민들은 늘 광장에서 승리하고 일상에서 패배해왔다. 광장에서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했으나, 일상에서 우리는 억눌리고 소외되었다. 그토록 많았던 광장의 동료 시민들은 내 삶의 일상에서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 이색적인 기사가 포털 메인에 올랐다. "식사 후 바로 누우면 위암에 잘 걸린다"는 제목의 기사다. 대한암예방학회에서 발표한 7대 위암 예방수칙 중 하나였다. 기사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수백개의 댓글들이 달렸다. 평소 식사후 바로 눕는 편인데 위암이 걱정된다는 자책의 목소리도 있었다. 아무래도 어색하고 의아하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논문 등 근거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넓은 세렝게티를 종일 헤매고 다녀도, 만나는 사자들마다 다 꾸벅꾸벅 졸거나 늘어져 자기만 합니다. 사자들이 이렇게 하루 종일 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렝게티 사자에겐 냉장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번 사냥하면 2,3일은 배부르기에 그냥 자면서 쉰다는 거죠. 괜히 많이 잡아봤자 고기만 상하지요. 냉장고가 있다면 배가 불러도 사냥을 나갈 겁니다. 야생에서는 그날 하루 잡아 하루 먹고 삽니다. 영화 '아저씨'의 원빈인거죠. '난 오늘 하루만 산다.' 인간의 삶이 피곤한 이유는, 잉여가치를 돈의 형태로 축적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요?
혁명의 일차적 성공이 혹시라도 4·19 이후와 같은 변질로 귀결되지 않을까, 또는 87년체제의 단순한 변형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어느 자리에서 하든 긴요하다. 그런 점에서 '광장'과 '일상'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깊이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렇게 연결되어 있음을 상시적으로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주말마다 집회에 참석하는 것은 주중의 힘든 일상을 개혁하기 위해서이고, 주중의 압박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는 것은 주말의 행동을 통해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 아닌가.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정말 다들 아무말이나 막 던지고 있다. 나는 작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설령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말하는 것처럼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 투표를 한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임기와 국회의원의 임기를 동기화하는 그런 종류의 개헌이라면 나는 결사적으로 반대하겠다. 군사독재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면 그것은 선거를 통해 합법성을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민주독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대선과 총선을 결합시킨다는 건 총통을 뽑자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그런 개헌에 반대한다.
유승준이 뭘 잘못했습니까? 약속을 어긴 거요? 발언을 철회하고 국적을 바꾼 것이 사회적 살인을 감행할 만한 일입니까? 천만에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형평성'을 운운하시는 분들이라면, 애초에 군 입대를 앞둔 징집 대상자에게 출국을 예외적으로 허가해준 병무청의 어긋난 형평성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겠죠. 유승준을 개인적으로 증오할 수 있습니다. 그건 개인의 기호-가치 판단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국가 시스템이 나서서 유승준이라는 인격의 혐오를 조장하는 일은 잘못된 겁니다. 그건 시민혁명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사회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시스템은 저열한 겁니다.
지난 3월 1일 프리츠커상을 주관하는 하얏트 재단은 2017년 프리츠커상 수상자로 스페인의 건축사무소 RCR를 지명했다. 전 세계 언론은 '건축계의 노벨상'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건축가들, 그것도 역사상 최초로 공동 파트너 3명에게 돌아갔다며 연신 이야기를 내보냈다. 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해 심사 평을 읽는데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다른 카테고리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클릭에 클릭을 거듭할수록 그 속도는 빨라졌고 종국에는 뿅 망치로 머리를 세차게 내리치는 충격을 받았다.
친구가 실수로 이상한 사진을 올린 적이 있었다. 친구는 곧 그 사진을 지웠지만, 이미 나를 포함한 많은 친구들이 스크랩해 간 후였다. 돌이켜보면 참 사소한 해프닝이었지만, 그때 난 정말 큰 충격을 받았었다. 한 번 온라인 공간에 뭔가가 올라가면 이젠 진짜 끝이구나. 그때부터 전체공개로만 글과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특정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 있다면, 그 누구한테도 보여주지 않는 게 답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좋든 싫든 우리는 모두에게 떳떳하지 않으면 아무에게도 떳떳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