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기 가족이 있고 사유 재산이 있고 어린아이가 기다리고 있고 직장이 있고 내 비자가 합법적이고 세금을 내고 있고... 등등 기타 모든 사정과 하등 관계 없이 90일 동안은 집으로 갈 수 없다. 난데없다. 아이를 동반하고 있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미성년자를 동반한 경우에 대한 예외도 없다. 아이 역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고 학교에도 갈 수 없다. 학생들도 마찬가지고 출장자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이유도 없는 거다. 그냥 국적이 문제일 뿐. 그러니 저 행정명령은 말할 수 없이 황당한 동시에 매우 공포스럽기도 하다. 미국이 저런 짓을 7개 국가 국민 및 난민을 대상으로 난데없이 저지를 생각을 했다면 같은 짓을 어느 나라를 대상으로 해서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그 어느 법률과 규칙에도 특정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고 하여 방송에서 퇴출시키도록 하는 조항은 없다. 특정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공화국 시민의 권리이다. 그러므로 이를 막아세우는 법률과 규칙은 없으며 공영방송의 내부 규정과 준칙에도 이 권리를 침해하는 조항을 둘 수 없는 것이다. KBS가 내린 나에 대한 출연 금지 결정은 따라서 위법하게 나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나는 침해당한 내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공화국의 시민이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몇몇 댓글이 눈을 찔렀다. "폼으로 맥 사놓고 윈도 프로그램 쓰려고 하네. 그럴 거면 왜 샀냐?" "왜 맥에서 돼야 함? 여기가 미국이냐 ㅋㅋㅋ." "걍 윈도 쓰면 되잖아." 아득했다. 불편하면 윈도 쓰라고? 언제부터 마이크로소프트 윈도가 우리나라 표준 PC 운영체제가 됐단 말인가. 이 나라에선 '운영체제 선택의 자유'는 없는가. 맥 PC를 쓰는 일이 왜 허세로 비치는 것일까. 백번 양보해서, 허세로 맥을 쓰는 이용자는 공공서비스에 접속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건가. 언제부턴가 이 당연한 요구는 마치 '떼쓰면→선심 쓰는' 일처럼 인식돼버렸다.
지난 몇 달 동안 국정이 올스톱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트럼프의 당선으로 세계경제는 격랑 속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는데 우리 정부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이런 혼란상이 연말까지 계속된다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칩니다. 그 사이에 우리가 그동안 소중하게 쌓아놓은 경제적, 사회적 자본이 얼마나 대규모로 탕진되고 말겠습니까? 새삼 깨닫게 된 것이지만 그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헌재와 특검이 한시라도 빨리 이 혼란상에 깨끗한 종지부를 찍어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최근 국회에서의 박근혜 풍자 누드화 소동은 여러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뭔가 빗나간 문화적 이해의 문제로 보인다. 말하자면 서구 미술사에서 누드는 오늘날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 평가하든 간에 나름 역사적으로 축적된 표현의 문법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한국 미술에서 누드라는 것은 좀 생뚱맞게 차용된 형식일 수밖에 없다. 서구의 경우 전통적인 방식이든 아니면 현대적인 재해석이든 간에, 거기에는 일정한 의미의 고정과 재해석에 대한 규칙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이번 박근혜 풍자 누드화에서는 전혀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정치적 충돌 이전에 시각적 문법의 부재가 불러일으킨 좌충우돌의 하나로 보인다.
헌법재판소 제9차 변론기일에서 1월 31일 퇴임을 앞둔 박한철 소장은 탄핵심판의 최종 선고가 내려져야 할 데드라인으로 3월 13일을 제시했다. 이 날은 이정미 재판관의 퇴임 예정일로 두 명의 재판관이 퇴임하여 결원이 생기면 7명의 재판관이 탄핵심판을 수행함으로써 결정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었다. 대통령 대리인단은 즉각 재판의 공정성을 문제 삼으며 변호사 전원이 사퇴(사임)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헌법재판소법(헌재법)에 규정된 이른바 '변호사 강제주의'를 볼모로 재판을 지연시키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황교익의 출연정지 소식이 알려지자 반기문을 명시적으로 지지하는 인사들이 아무 일 없이 KBS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는 사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황교익에 대한 출연정지는 사실은 황교익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대선을 앞두고 앞으로 문재인이나 야당 후보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더 나아가 황교익처럼 깊숙하게 역할을 할 수도 있는 모든 잠재 출연자를 향한 것이었다. 앞으로 문재인 지지하는 뭔가를 하면 황교익처럼 당할 테니 조심하라는 것. 이름하여 시범케이스였다. 방송출연을 무기로 자연인의 정치적 의사와 그에 따른 행동을 통제하려는 지극히 반민주적이고 반문명적인 행위다.
투표를 하는 데 후보자의 배우자까지 고려를 해야 하는가? 그건 각자의 선택이다. 하지만 더는 남편과 아내(혹은 남편과 남편, 혹은 아내와 아내)는 후보자와 내조자가 아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살며 어느 정도 공통적인 삶의 가치를 함께 쌓아온 파트너다. 그들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미시적인 정치는 결국 거시적인 정치로 이어지거나 확장된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버락 오바마와 미셸 오바마의 8년으로부터 충분히 배웠다. 게다가 오랜 세월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협력해온 사람의 모습은 결국 후보자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로부터 우리는 후보자를 더 잘 알 수도 있다.
아이가 하나인데, 부모가 죽고 나서 혼자 외로울까 봐 걱정이라는 친구가 있어 이렇게 말해줬습니다. "야, 요즘은 부모가 90에 죽으면 자식도 나이가 60이야. 그 나이에 외로우면, 지가 인생을 잘못 산 거지, 어찌 형제를 낳아주지 않은 부모 탓이겠냐?" 100세 시대, 인생을 좀더 여유롭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10대 20대에 공부하고, 30대 40대에 일하고, 50대 60대에 놀다가 간다.' 이렇게 20년씩 딱딱 끊어서 인생의 단계를 나눌 수 없어요. 100세까지 사는 인생이므로 나이 칠팔십에도 일을 해야 하고, 오륙십에도 공부를 새로 해야 합니다. 일과 공부와 놀이가 돌고 도는 순환의 삶을 사는 시대거든요.
일본동물원수족관협회는 투표를 거쳐 세계동물원수족관협회 잔류를 결정하고, 다이지에서 잡힌 돌고래를 더 이상 들여오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지의 돌고래 사냥은 계속되고 있다. 2016-2017년 사냥철 동안 총 132마리의 큰돌고래, 1마리 파일럿고래, 18마리의 알락돌고래가 산 채로 포획됐다. 그 과정에서 459마리가 도살됐다. 일본 안에서 거래할 수도 없는 돌고래를 계속해서 잡아들이는 이유는 바로 우리나라와 같은 돌고래 수입국이 있기 때문이다. 사냥 마지막 날인 25일. 돌고래 떼가 산산조각이 나버린 그 순간 우리나라 울산에서는 남구청이 일본 와카나마현 다이지에서 돌고래 두 마리를 수입할 것임을 밝히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인터뷰 직후 '거침없이 질문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1시간 10분 동안 진행된 인터뷰는 본질보다 시중 루머를 중심으로 오로지 박근혜 대통령의 변명을 포장하고 옹호하는 자리에 불과했습니다. 정규재 주필은 '청와대에서 굿을 했느냐?' '정유라가 대통령의 딸이냐' '정윤회와 밀회를 했느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연히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루머 등에 '끔찍한 거짓말, 저질스런 거짓말'이라고 답했습니다. 거침없이 돌직구를 날렸다고 했지만, 이런 식의 시중 루머를 계속 물어보는 것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본질을 훼손합니다. 10%의 진실을 섞어 90%의 거짓을 진실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보입니다.
박근혜는 여전했다. 박근혜는 거짓말과 모르쇠와 부인과 억지와 떼쓰기로 일관했는데, 박근혜의 죄상(罪狀)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사람이 안다. 민주공화국을 유린하고 헌법을 파괴했으며 국가기관을 사유화해 사익을 챙긴 대역죄인 박근혜를 비난할 표현이 좀체 떠오르지 않는 터에 박근혜에게 들려주고 싶은 촌철살인을 발견했다. 박근혜의 공범 최순실 킬러(?)가 한 발언이 그것이다.
재패니메이션의 "모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서비스 연출"은 길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판치라, 바스트 모핑으로 대표되는 이 연출에 대해서는, 안노 히데아키가 《에반게리온 파》에 새로운 캐릭터 마리를 등장시키면서 콘티에 썼다던 "야하게, 피규어 많이 팔리게"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의 존재를 상품화해서 내놓고, 그것으로 하나의 코드를 만들어 나간다. 거기에 덧붙인 재패니메이션 특유의 과장된 연출은 이 장르의 일정한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신카이 마코토의 신작 《너의 이름은》 역시 이 공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러나 그는 이 영화에서 아주 재미있는 방식으로 "모에"를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로 다른 젠더의 두 사람을 연대하게 하는 방식이다.
황금알을 낳는 원전산업, 과연 그 천문학적 이익은 어디로 돌아갈까요? 원전 산업은 실질적으로는 독과점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요기기를 거의 독점으로 납품하는 두산중공업과, 과점형태인 주설비공사를 따내는 삼성물산, 현대건설, SK건설과 같은 주요 건설사들이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입니다. 소수 대기업으로서는 엄청난 수익을 거둘 수 있는 너무 쉬운 시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뇌물, 재취업, 연구비를 통해서 원전 공기업, 원전 당국, 원자력 학계 등이 그 이익을 공유하면서 그들만의 견고한 카르텔이 유지되고 확대되는 것이지요.
현재의 모습으로는 다가오는 대선에서 야권의 누가 승리를 하더라도 수구를 압도할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기 어렵다. 이는 새 정부가 개혁 작업을 힘있게 추진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며, 개혁 작업이 지지부진해질 경우 촛불혁명의 진전도 새로운 장벽에 직면하게 할 것이다. 당장 더 큰 문제는 야권이 분열된 상태에서 유력 정당과 후보가 대선 승리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하는 정치공학적 고려가 종종 기득권 세력에 타협적 태도를 취하게 만들 가능성을 높인다는 점이다. 지난 총선 때처럼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라는 프레임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가장 대표적이다.
권리를 가진 사람에게 그 권리에 따라 혜택을 주는 것을 포퓰리즘이라고 한다면, 아무 권리도 없는 기득권층에게 예산과 특혜를 몰아줘서 막대한 공짜돈을 챙기게 하는 정책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을 추진하여 토건귀족들의 주머니를 채운 것은 무슨 정책인가? 기업의 활력을 살리고 국민경제를 활성화시킨 구국의 결단이라 해야 할까? 박근혜 정부가 억지로 부동산 시장을 부양하여 건설족의 이익을 극대화한 것은 또 어떤가?
외교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이 '미스터 불확실성'(Mr. Uncertainty)은 다른 국가들의 대외정책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부여하고 있다. '고립주의'가 트럼프의 대외정책을 담아내는 키워드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오류와 왜곡의 함정이 놓여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민주주의, 자유무역, 평화, 인권, 환경 같은 원칙이 아니라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만 좇겠다는 점에서만 고립일 뿐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미국의 이익이 걸린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입할뿐더러 체면도 불사하고 난폭해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김사부는 수술방에 들어가는 의료인들에게 수술을 위한 조치로 보호안경 착용, 1회용 수술가운을 입고, 장갑도 꼭 2장을 끼라고 지시한다. 이러한 조치는 HIV 감염인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모든 환자에게 행하는 모든 수술 시에 취해야 한다. 극중에서 HIV 감염인과 동시에 옆 수술실에서 총탄제거수술이 진행되는데 여기서는 의료진이 보호장구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수술을 하는데 이게 더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HIV에 대해 특별한 소독방법이 필요하지 않고, 수술 후 24시간 수술실을 폐쇄할 필요가 없다. 즉 해야 할 것(총탄제거수술 시에도 보호장구를 착용하고 수술 후 수술실 소독과 청소를 해야 한다.)은 하지 않고 하지 않아도 될 것(에이즈환자 수술실 24시간 폐쇄)을 강조하였다.
「더러운 잠」은 원본인 「올랭피아」를 조롱하려는 것은 분명 아니고, 원본이 지닌 의미와도 아무 관계가 없다. 단지 「올랭피아」가 잘 알려진 그림이고 누드화라서 선택한 것 같다. 풍자의 대상(박근혜)을 누드로 묘사해 희화화하려 한 게 아니었나 생각된다. 하지만 이 그림은 '에러'(에로가 아니다)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풍자는 항상 해학이란 단어와 붙어 다닌다. 그림을 딱 본 순간 마음 속에 일말의 통쾌함과 웃음이 번지지 않으면 풍자화로서는 실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