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모임에 참여했을 당시에 열 명 남짓을 기록하던 참여자 수가 지금은 50여명을 넘어섰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각종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각종 행사에 게스트로 참여하며 우리들의 이야기를 대중에게 알렸다. 2년 전 미국에서 느꼈던 감동과 희망을, 지금 한국에서 느끼고 있다. 보람차고 벅찬 순간이다.
과학으로 문제가 생기면 과학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셰일 가스를 추출하고는 셰일 가스에서 나온 이산화탄소를 가두는 법을 연구한다. 지반 아래에 가둬 놓은 이산화탄소가 혹시 터지면 아마 그때는 좀 더 깊은 곳에 더 단단하게 숨기는 법을 연구하겠지. 어쩌면 이제 우리는 문제가 애초에 생기지 않게 하는 방법에 모든 논의의 초점을 맞추도록 사고의 틀을 완전히 바꿔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과연 사유능력이 박약한 박근혜를 캐스팅하여 대통령 자리에 밀어 올린 세력들은 사유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을까. 박근혜의 비정상적 행태를 익히 알만한 거리에 있으면서도 단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침묵의 카르텔을 공고히 한 사람들에게 사유능력은 정상적이었을까.
우리의 섹스는 하나의 이벤트로 끝났다. 엄청난 폭죽(남자의 사정)과 함께 열렬히 불타버리고 다시 차가운 일상으로 돌아가 버리는 화이트데이 기념일처럼. 이후에도 우린 차 마시고, 영화 보고, 밥 먹고, 섹스하는 데이트코스를 밟다가 여느 청춘로맨스 영화가 그렇듯 애틋하게 헤어졌다. 이벤트 사랑, 이벤트 섹스, 이벤트 관계였다.
민주사회의 정당은 정책으로 국민의 표를 받도록 공정한 경쟁을 펼쳐야 한다. 이때 박근혜 정부처럼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걸어 당선된 뒤 정당한 사유 없이 나 몰라라 하는 표리부동의 정치 행태는 사라져야 한다. 정당은 변화에 부응하는 정책적 일관성으로 국민의 신뢰를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정당은 토해내는 일련의 정책에 기본적 숨결을 불어넣는 정치적 가치, 즉 정치철학을 나름의 고유한 것으로 구축해야 한다.
'실제로 일어날 법한 사건'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은 전혀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가 없다. 판도라를 보며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고 마지막에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보면 해피엔딩은 아니고 또 이 영화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다.
가짜 뉴스를 걸러낸 뒤에도 이미 퍼져나간 거짓 정보를 회수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실 검증은 뉴스 작성 뒤가 아닌, 작성 이전과 작성 중에 작동해야 제 효력을 발휘한다. 그 과정에 정보기술이 도우미로 투입된다. 'FiB'는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 재학생 나바니타 드, 큉린 첸, 마크 크래프트, 어난트 고엘이 함께 만든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요즘 뉴스 유통의 대세 '페이스북'을 겨냥했다.
낙태가 죄라는 식의 성교육은 임신한 여자에게 도움되지 않는다. 이들의 처지만 생각한다면, 오롯이 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당신은 무슨 선택을 하겠는가? 당신의 순진해터진 딸이, 사촌동생이, 동생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콘돔 말도 꺼내지 못했다면, 그 선배라는 놈이 술을 억지로 먹여 관계를 가졌지만 강간을 증명하기 힘들다면, 당신은 그녀에게 대한민국 출산율이 낮으니 나라를 생각하고 낳으라고 할 것인가?
팔이나 다리를 대신해주는 인공 대체물이 아니라, 뇌의 일부를 대체하는 기술은 과연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에 머물게 할 것인가? 아니며 거의 새로운 종으로 진화하게 할 것인가? 이 기술은 치료용으로만 머물 것인가, 아니면 우월한 능력을 만들어내는 데 활용될 것인가?
87년과 다른 점은 적지 않은 시민들이 이 점에 대해서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만 전혀 경험이 없었던 일이라 혼란스러워 하기는 해도 우리가 지난 4년간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 큰 것들이라는 마음으로 시대적 과업을 다할 것을 다짐이라도 하는 듯 하다.
일본에 저항하다가 귀향을 간 최익현이 중국을 기리는 글씨를 새겨놓은 것을 두고 오늘날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은 역사 의식의 결여라고 본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모두 이중국적자들이다. 그들은 중국인이면서 동시에 조선인이었다. 중국 황제의 신하이면서 동시에 조선왕의 신하였다. 이는 전혀 모순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곳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공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원작의 제목을 차용했다." '이름 없는 건축'이 제목에 내비친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은유적인 태도는 아마 고(故) 백남준이 생전에 들었어도 꽤 흡족해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전임 대통령들이 개헌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많은 국민과 지식인, 언론은 '적기'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러나 사실 분명한 것은 87년 헌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대로 '수명'을 다했고, 노 전 대통령이 담화를 한 지 10년이 되어가는 지금 대한민국은 5년 단임제 대통령의 탄핵 심판을 앞두고 있다.
이 나이에 본 〈죽여주는 여자〉는 가슴을 찢는다. 달아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늙음과 죽음에 얼굴을 돌리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대하는 것이 인간적 존엄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다. 나는 젊음과 생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애호가 인간을 괴물로 만든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옳은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옳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생각의 방향이 반드시 옳은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옳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생각의 방향이 경직된 사고에 갇혀버렸을 때 그 결과는 옳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변질된다.
전경련은 한마디로 박정희 시대와 함께 시효를 다한 조직이다. 그 시대를 넘어 억지로 존재하려니 케이스포츠재단, 미르재단 등의 모금을 사실상 주선하고 어버이연합을 지원하는 등의 무리수가 나온다. 임직원들과 주변 연구자들에 대한 보수는 점점 후해진다. 조직이 사명을 잃고 나면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로드샵 화장품 브랜드들이 화장품 시장에서 자리잡은지 이제 10년도 넘은 시점에서 소비자들의 저렴한 화장품에 대한 이미지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저렴이 화장품" 을 저격하는글을 보니 오랜만에 인터넷을 떠도는 화장품 루머들에 대한 팩트 체크를 해봐야 할 것같다.
인간은 우월과 열등, 주류와 비주류, 중심과 주변으로 타자를 위계 세운다. 차별은 '합리적 이성'으로 정당화된다. 폭력의 원리다. 백인과 흑인, 서양과 동양, 문명과 야만,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이 그래왔다. 때문에 나는 비인간 동물이 나보다 열등하다고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폭력을 정당화할 '합리적 이성'의 근거를 잃어버렸다.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지지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정치권이 자기네 후보를 결정하는 방식 자체가 촛불 이전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시민들의 거대한 노력과 희생으로 대통령을 축출하고 정치판 전체를 흔들어놓았는데 유독 정당들만은 87년체제가 만들어낸 틀 그대로 당내 경선을 치르고 그렇게 탄생한 서너명의 유력후보 중 하나를 옛날식 그대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으면 제일 덜 싫은 후보라도 찍으라고 들이미는 것은 심지어 상도의(商道義)에도 어긋나는 일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