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유지적인 권한행사는 말 그대로 국가기능이 정지되지 않고 현재상태로 유지되도록 관리하는 범위의 권한행사를 의미한다. 현상유지적인 정도의 권한행사는 원칙적으로 새로운 정책의 결정 또는 기존 정책의 내용변경이나 폐지, 공석인 공직의 임명 또는 기존 공직자의 면직이나 보직변경처럼 새로운 상태를 만들어내는 권한행사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될 수 있는 국무총리나 국무위원도 탄핵의 대상이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헌법이 허용한 권한범위를 넘어서 권한을 행사하면 법위반으로 탄핵소추가 가능하다.
연말이 되면 한국갤럽에서는 올해를 빛낸 영화배우를 발표한다. 여자는 9위에 오른 전지현 한명이다. 이 리스트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게 정답이다. 기사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좀 진지하게 반응하려 해봤다. 〈비밀은 없다〉 〈덕혜옹주〉의 손예진이 빠져 있는 2016년 배우 리스트가 과연 정상인가? 〈아가씨〉의 배우 중 유일하게 순위에 오른 사람이 하정우라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9위에 전지현이 오른 걸 보고 조용히 포기해버렸다. 전지현은 지금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맹활약하고 있긴 하지만 올해는 영화 작품이 없다.
거짓말과 시간끌기로 일관된 박근혜의 헌재 제출 답변서가 박근혜의 노림수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답변서의 백미는 "대통령이 최씨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최순실의 행위에 대한 모든 책임을 대통령의 헌법상 책임으로 구성한 것은 헌법상 연좌제 금지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대목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3조는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지금 박근혜의 대리인단은 최순실과 박근혜가 친족 사이였다고 자백하는 것인가?
사람을 만나는 일 하나하나가 다 기싸움이 된다. 대접을 받아도 감사와 기쁨이 없고, 대접을 덜 받으면 분노하고 폭발한다. 대접받는 것이 나의 가치를 증명하기 때문에, 늘 상대방이 나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주시하고, 그것으로 사회에서의 나의 위치를 가늠한다. 이러니 늘 피곤할 수밖에. 게다가 다른 사람을 하나하나 컨트롤 할 수도 없으니 내 행복은 셀프 컨트롤이 불가능하다.
박용철이 살해당해서 증언을 할 수 없었고 결국 신동욱 재판에서는 별다른 증거가 없었으니 '살인 교사가 없었다'고 결정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구속영장청구서에서의 주진우에 대한 유죄논리가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살인교사가 없었다고 신동욱 재판에서 이미 결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반하는 내용을 전제로 기사를 썼으니 유죄'라는 것이다. 이건 마치 "축구에서 골이라고 이미 판정이 났으므로, 골판정을 한 심판이 매수되었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허위이다"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결국 "살인교사는 없었다고 판정났으니 살인교사는 없었다"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나지 않던 국정원의 존재가 대법원장 사찰문건 공개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삐죽 튀어나온 셈이다. 총체적 국기문란 사태에서 국정원이 빠지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2014년 1월에 작성된 대법원장 사찰문건은 2012년의 대선댓글개입으로 2013년 내내 검찰수사와 국회특위에 시달렸던 국정원이 2014년에도 여전히 안에서는 딴짓을 해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2014년 2월28일로 끝난 국회특위의 국정원 개혁안이 과연 국정원의 무분별하고 불법적인 국내정보 수집관행을 바로잡았을지 전혀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
오메가패치가 논란이 된 이후에는 임산부 배려석은 기피석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려를 강요하는 충격요법은 역효과를 낳았다. 이제는 객차 안에 임산부가 없어도 눈치가 보여 앉지 못하는 상황. 결국, 임산부 배려석은 눈치석이 됐다. 임산부가 없는 상황에선 속한 말로 낯짝 두꺼운 사람이 앉는다. 뻔뻔한 사람이 앉는다는 건 그만큼 양보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005년 7월 13일 김정일 북한위원장에게 보낸 편지가 박사모 카페에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제목은 '문재인 비서실장 당시 북측에 올린 편지(문재인은 안됩니다)'였습니다. 박 대통령이 보낸 편지가 문재인 전 의원이 보낸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박사모 카페에 편지가 올라오자 '종북' '빨갱이'라는 댓글은 물론이고,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설까지도 달렸습니다.
문재인(등 민주당) 대선후보와 안철수 대선후보가 권력을 잡고 싶어하는 욕망-욕구를 인정-존중해야 한다. 그것을 전제로 '양자가 합의가능한' 해법을 시도해야 한다. 정치연합은 본질적으로 '지분연합'이다. 지분연합을 전제하되 더욱 진일보한 형태는 가치와 정책에 기반한, 공동정부이다. 문재인 후보는 '87년 김대중'이 아니라, '97년 김대중'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것은 바로 1) 상대방의 지분을 보장하는 2)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 따위가 아니라) 정치적 담판에 의한 3) 가치와 정책의 공통점에 기반한 공동정부의 구성이다. 1997년 김종필은 차기 대통령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했다. 2017년 안철수는 다르다.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은 교총에서 반대하고 나선 점이다. 교총 회장이 TV토론에서 외고개혁에 반대하는 쪽 패널로 나왔다. 교총은 일반 교사들이 주축인데 그들을 대표하는 교총회장이 반대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조·중·동은 교총회장 말을 인용해 마치 전 교육계가 반대하는 것처럼 1면에 기사를 올리곤 했다. 당시 교총회장이 서울시 교육감에 출마한다고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이주호에게 얘기해서 교사들 자료를 달라고 했다. 교사들을 상대로 1000만원 가량의 비용을 들여서 여론조사를 했더니, 교사들은 외고개혁에 대해서 90% 이상이 찬성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일반인보다도 찬성비율이 더 높았다.
홍상수 감독의 신작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민정의 대사, "혹시 저 아세요?"는 처음에는 웃음을 나중에는 섬뜩함을 남기는 방식으로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방황하던 주인공 영수는 결국 민정을 처음 만나는 사이로 수긍하며 민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리에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려고 한다. 사실, 익숙한 틀이나 패턴으로 타인을 규정한 뒤 그것을 우리의 앎으로 뒤바꾸는 일은 너무 흔하다. 대개는 그러고 살지 싶다.
내가 '배운 여자'이기 때문에 나는 저학력의, 빈곤층 남성들의 젠더 감수성을 비판할 자격을 박탈당하는가? 어째서 '젠더'가 계급을 형성하고 여기에서 착취와 차별과 억압이 일어나고 있음은 은폐되는가? 다시 말하자면, 어째서 젠더의 계급-또는 여성성의 계급('창녀'와 '모성'의 스펙트럼 같은)은 계급의 문제로 논의되지 않는가? 블랙넛이나 정중식처럼, 소위 '루저' 감성의 혹은 실제로 남성성 경쟁에서 상대적 약자인 남성이 여성을 대상으로 착취나 비하, 혐오 발언을 할 때 이것이 논란이 되면 왜 그들보다 계급이 높은 여성을 기어이 '가정'하고, 여성이 반드시 약자는 아니라는 아무말 결론을 이끌어내는가?
촛불이 박근혜를 탄핵했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혁명이 시작되고 있다. 이 혁명은 최종적으로 나와 우리의 삶에, 나와 우리의 삶을 옥죄었던 모순의 구조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같은 일을 하고도 임금을 절반밖에 못 받는 일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법과 민주적 절차를 지키라고 요구했다가 여전히 해고 통보를 받거나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소수자라서 차별을 받는 일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슬픔이 풀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국립국어원에 의하면, 아가씨는 '시집갈 나이의 여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이고, 아줌마는 아주머니를 낮추어 이르는 말로 '결혼한 여자를 예사롭게 이르거나 부르는 말' 이다. 아가씨와 아줌마의 경계선에는 바로 결혼이라는 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성년 남자'를 말하지만 아저씨는 '성인 남자를 예사롭게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아주머니와는 달리 결혼 여부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오사카 이쿠노 지역은 그야말로 '게토'였다. 일본의 최하층 천민집단 주거지역인 '부락'(部落)과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자의로 타의로 일본에 살던 조선인들 다수는 한반도가 일제강점에서 해방된 뒤에도 일본에 남았다. 일본인도, 그렇다고 망한 조선인도 아닌 애매한 신분의 재일동포들은 힘겨운 삶을 꾸려야 했다. 그들은 소와 돼지 내장으로 요리를 해 먹었고, 팔기도 했다. 일본에서 지금 크게 유행하고 있는 '야키니쿠와 호루몬(내장)' 요리의 원조가 바로 그 슬픈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지금도 이쿠노 지역에 가면 노점에서 내장을 구워 판다.
한동안 잠잠하던 '범죄자 예측 기술'이 또다시 수면에 떠올랐다. 이번엔 '인공지능'이 가세했다. 중국 상하이 자오퉁대학 후샤오린과 장시 두 연구원의 작품이다. 둘은 다양한 머신비전 알고리즘을 활용해 범죄자와 비범죄자의 얼굴 특징을 분석했다. 그랬더니 두 집단의 차이점이 발견됐다. 후샤오린과 장시는 범죄형 얼굴에서 세 가지 특징을 찾아냈다. 범죄자는 비범죄자보다 ①윗입술 곡률이 평균 23% 더 크고 ②눈 사이 거리가 평균 6% 더 짧으며 ③코끝과 입술 양쪽 끝을 연결했을 때 선의 각도가 평균 20도 정도 작다는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와 미시마 유키오는 거의 동일한 인격체가 서로 완전히 양극단의 삶을 선택함으로써 도달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끝은 똑같은 자살이었다. 이처럼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는 드물지만 어찌됐든 우리 모두는 어떤 면에서 다자이이기도, 또한 미시마이기도 하다. 우리는 본래의 타고난 부분에 순응해 살아가고, 가끔씩은 그것을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놀라운 성취를 거두기도 한다. 한편 정말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본성이나 실수 앞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현실을 뒤틀어 재구성해버리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왜곡과 거짓, 고통과 외면의 기억 또한 잘 정돈된 예술의 토대 위에 쌓아올리는 데 성공한다.
우리는 박정희와 헤어질 준비가 돼 있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민심과 국회에 탄핵됐지만 55년 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축조한 획일적 국가주의의 앙시앵 레짐(구체제)은 현재진행형이다. 이기적 욕망과 상실의 공포가 교차하는 혼돈의 경계에서는 양심과 정의 대신 복종과 타협을 선택하라고 유혹하는 박정희 패러다임이 예외 없이 작동하고 있다. 박정희는 난공불락이었다. 그와 싸웠던 생전의 김근태는 "한국의 모든 대통령은 18년이라는 무한대의 정치적 시간을 가졌던 죽은 박정희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벌여야 했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에 낯설다. 낯섦은 자연스럽다. '단일한 대오'에 대한 환상을 버리자. 광장 내의 성추행, 여성과 장애인 등의 비하 발언에 대한 문제 제기를 일부의 예민함으로 다루려는 편협함도 버리자. 우리가 '단일'해야지만 이기는 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힘은 "모든 국민은 아무도 똑같게 태어나지 않았고, 인간으로서 존엄하며,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에 대한 믿음이 아닌가. 그런 믿음이 없다면 생면부지의 수백만명이 어떻게 한자리에 모여서 같은 구호를 외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