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배운 여자'이기 때문에 나는 저학력의, 빈곤층 남성들의 젠더 감수성을 비판할 자격을 박탈당하는가? 어째서 '젠더'가 계급을 형성하고 여기에서 착취와 차별과 억압이 일어나고 있음은 은폐되는가? 다시 말하자면, 어째서 젠더의 계급-또는 여성성의 계급('창녀'와 '모성'의 스펙트럼 같은)은 계급의 문제로 논의되지 않는가? 블랙넛이나 정중식처럼, 소위 '루저' 감성의 혹은 실제로 남성성 경쟁에서 상대적 약자인 남성이 여성을 대상으로 착취나 비하, 혐오 발언을 할 때 이것이 논란이 되면 왜 그들보다 계급이 높은 여성을 기어이 '가정'하고, 여성이 반드시 약자는 아니라는 아무말 결론을 이끌어내는가?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은 교총에서 반대하고 나선 점이다. 교총 회장이 TV토론에서 외고개혁에 반대하는 쪽 패널로 나왔다. 교총은 일반 교사들이 주축인데 그들을 대표하는 교총회장이 반대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조·중·동은 교총회장 말을 인용해 마치 전 교육계가 반대하는 것처럼 1면에 기사를 올리곤 했다. 당시 교총회장이 서울시 교육감에 출마한다고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이주호에게 얘기해서 교사들 자료를 달라고 했다. 교사들을 상대로 1000만원 가량의 비용을 들여서 여론조사를 했더니, 교사들은 외고개혁에 대해서 90% 이상이 찬성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일반인보다도 찬성비율이 더 높았다.
촛불이 박근혜를 탄핵했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혁명이 시작되고 있다. 이 혁명은 최종적으로 나와 우리의 삶에, 나와 우리의 삶을 옥죄었던 모순의 구조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같은 일을 하고도 임금을 절반밖에 못 받는 일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법과 민주적 절차를 지키라고 요구했다가 여전히 해고 통보를 받거나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소수자라서 차별을 받는 일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슬픔이 풀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국립국어원에 의하면, 아가씨는 '시집갈 나이의 여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이고, 아줌마는 아주머니를 낮추어 이르는 말로 '결혼한 여자를 예사롭게 이르거나 부르는 말' 이다. 아가씨와 아줌마의 경계선에는 바로 결혼이라는 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성년 남자'를 말하지만 아저씨는 '성인 남자를 예사롭게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아주머니와는 달리 결혼 여부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오사카 이쿠노 지역은 그야말로 '게토'였다. 일본의 최하층 천민집단 주거지역인 '부락'(部落)과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자의로 타의로 일본에 살던 조선인들 다수는 한반도가 일제강점에서 해방된 뒤에도 일본에 남았다. 일본인도, 그렇다고 망한 조선인도 아닌 애매한 신분의 재일동포들은 힘겨운 삶을 꾸려야 했다. 그들은 소와 돼지 내장으로 요리를 해 먹었고, 팔기도 했다. 일본에서 지금 크게 유행하고 있는 '야키니쿠와 호루몬(내장)' 요리의 원조가 바로 그 슬픈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지금도 이쿠노 지역에 가면 노점에서 내장을 구워 판다.
한동안 잠잠하던 '범죄자 예측 기술'이 또다시 수면에 떠올랐다. 이번엔 '인공지능'이 가세했다. 중국 상하이 자오퉁대학 후샤오린과 장시 두 연구원의 작품이다. 둘은 다양한 머신비전 알고리즘을 활용해 범죄자와 비범죄자의 얼굴 특징을 분석했다. 그랬더니 두 집단의 차이점이 발견됐다. 후샤오린과 장시는 범죄형 얼굴에서 세 가지 특징을 찾아냈다. 범죄자는 비범죄자보다 ①윗입술 곡률이 평균 23% 더 크고 ②눈 사이 거리가 평균 6% 더 짧으며 ③코끝과 입술 양쪽 끝을 연결했을 때 선의 각도가 평균 20도 정도 작다는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와 미시마 유키오는 거의 동일한 인격체가 서로 완전히 양극단의 삶을 선택함으로써 도달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끝은 똑같은 자살이었다. 이처럼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는 드물지만 어찌됐든 우리 모두는 어떤 면에서 다자이이기도, 또한 미시마이기도 하다. 우리는 본래의 타고난 부분에 순응해 살아가고, 가끔씩은 그것을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놀라운 성취를 거두기도 한다. 한편 정말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본성이나 실수 앞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현실을 뒤틀어 재구성해버리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왜곡과 거짓, 고통과 외면의 기억 또한 잘 정돈된 예술의 토대 위에 쌓아올리는 데 성공한다.
우리는 박정희와 헤어질 준비가 돼 있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민심과 국회에 탄핵됐지만 55년 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축조한 획일적 국가주의의 앙시앵 레짐(구체제)은 현재진행형이다. 이기적 욕망과 상실의 공포가 교차하는 혼돈의 경계에서는 양심과 정의 대신 복종과 타협을 선택하라고 유혹하는 박정희 패러다임이 예외 없이 작동하고 있다. 박정희는 난공불락이었다. 그와 싸웠던 생전의 김근태는 "한국의 모든 대통령은 18년이라는 무한대의 정치적 시간을 가졌던 죽은 박정희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벌여야 했다"고 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모른다. 왜 시민들이 노무현에겐 기꺼이 던졌던 관심과 사랑을 자신들에겐 던지지 않는지를. 시민들은 노무현처럼 거악과의 투쟁에 목숨을 거는 정치인을 사랑하고 그에게 권력을 준다. 요컨대 노무현과 비노무현을 가르는 기준은 거악과 장엄한 싸움을 벌이는지 여부다. 노무현의 스타일만 흉내 내선 절대 제2의 노무현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에 낯설다. 낯섦은 자연스럽다. '단일한 대오'에 대한 환상을 버리자. 광장 내의 성추행, 여성과 장애인 등의 비하 발언에 대한 문제 제기를 일부의 예민함으로 다루려는 편협함도 버리자. 우리가 '단일'해야지만 이기는 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힘은 "모든 국민은 아무도 똑같게 태어나지 않았고, 인간으로서 존엄하며,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에 대한 믿음이 아닌가. 그런 믿음이 없다면 생면부지의 수백만명이 어떻게 한자리에 모여서 같은 구호를 외칠 수 있을까.
집이 없어서 친구네 얹혀 사는 엄마가 어떻게 아이와 함께 살 수 있을까. 하루에 18시간씩 일하는 아빠가 무슨 수로 아이를 돌볼 수 있을까. 정부가 이들을 위해서 한 일은 집이나 생활비를 지원하는 게 아니라, 아이를 키워줄 보육원이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내레이션을 쓰던 중, 원고에 넣었다가 뺀 문장이 있다. "이 정부의 정책이 유도하는 건 뭘까요? '아이 많이 낳으세요'라고 말하는 건지, '능력이 없으면 낳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건지 헷갈립니다."
그것은 지금과 달리 폭력 시위라고 한다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식의 논법에 대해 이렇게 묻고 싶다. 도대체 광화문에 170만이 넘게 모여 집회를 해도 부상자 한 명 연행자 한 명 없었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경찰의 압박 없이 자유롭게 의지를 표명할 수 있으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는 걸 입증하지 않는가? 집회의 자유가 대한민국 역사를 통해 가장 눈부시게 빛난 지금, 집회의 힘이 국가 개혁의 물꼬를 연 지금, 물대포로 사람을 죽이는 진압이 있던 집회의 책임을 엉뚱하게도 한상균 위원장이 3년의 징역형으로 뒤집어쓰는 일은 용납할 수 없는 불의(不義)이다.
여자를 팬 사람이 또 팰까요? 아마도요. 하지만 엄청나게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사람이 또 할까요? 사회 전체 분위기가 가정폭력에 아주 엄해진다면요? 좀 더 어렵겠죠. DJ DOC은 아마도 다음에 가사 쓸 때 너무 여혐스러운 건 안 쓸 거라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방법이 완전 페미니즘 중심으로 바뀌었을 리는 전혀 없지만, 최소한 노래 듣는 여자들이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노력은 하겠지요. 본심은 어떻든 간에, SOA인 저에게는 상관 없고 개사했으면 문제 해결입니다. 정치인들도 '여자가...' 발언은 조심하겠죠.
박근혜씨의 화법의 가장 큰 특징은 문장이 통으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중간에 끊지 않고 계속 한 문장으로 말하는 화법입니다. 최순실씨도 박근혜씨처럼 긴 문장을 한 번에 말합니다. "사실 고원기획(최씨가 고씨와 함께 설립한 회사)이고 뭐고 이렇게... 저기 고원기획은 얘기하지 말고 다른 걸 좀 해가지고 하려다가 도움을 받으려고 했는데 도움을 못 받았다, 이렇게 나가야 될 것 같애." 박근혜씨의 말은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문장을 별도로 쪼개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를 삼성의 나라에서 왔다고 소개할 때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난처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부정을 하자니, 국내에서도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을 쓸 정도이니 '삼성의 나라'라는 말도 사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또 한국에 대한 질문에는 북한과 교회가 자주 등장할 때도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이게 설명하기에 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정을 하지 않으려니 그 기업의 '유명세'에 의존해서 내가 나고 자란 나라가 설명되는 것 같아서 찜찜하고 불편했다. 이 회사에서 노동하다가 죽어간 사람들이 있고,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부패 및 경제문제들이 이 회사와 같은 재벌들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도 어려웠다.
이제 모든 시민은 박근혜가 여전히 반란을 꾀할 인물이라는 것을 안다. 박근혜는 헌재의 심리를 최대한 늦추면서 지지세력을 동원하고 대선경쟁의 이전투구 속에서 반전을 꾀할 것이다. 이 모든 상황들은 박근혜 즉각 퇴진 운동이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것이 비록 내 기억 속에서는 아픔이고 후회일지라도 그 모양 그 꼴들이 지금의 내 소중한 것들의 원인이기도 한 것이다. 그때 조금 더 공부를 했더라면 조금 더 많은 돈을 벌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 아이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난 일찍 장가를 가고 예쁜 아이들의 아빠가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어쩌면이라는 가정들의 퍼즐들을 몇 번만 끼워 맞춘다면 난 멀쩡한 눈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돈도 사랑도 나의 눈마저도 지금 내가 가진 어떤 소중한 것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조건이라면 난 쉽게 과거를 손대지 못할 것 같다.
오랫동안 사람들에 실망했기에 촛불집회에 참여하면서 얻은 것 중 개인적으로 제일 의미 있는 것은 동시대 사람들에 대한 신뢰 회복이다. 그 공간에서는 서로에게 너무 친절하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옆 사람의 존재가 소중한 느낌이 절절하게 전해진다. 꽤 오래 경험해왔던, 불신과 불안에 휩싸여 타인에게 공격적이고 거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집회 초기에는 박 대통령이나 최순실이 여성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 여성혐오적인 발언도 꽤 나왔다. 그러나 여성혐오적인 발언이 나온다는 사실보다 그 발언을 빠르게 비판하고 다시 나오지 않게 조심하는 모습에 더 눈길이 갔다.
앞에 펼쳐진 대형 스크린을 통해 내가 직접 대포알을 가지고 일본군의 전함을 파괴하고, 넘어오는 일본군을 직접 무찌르는 '가상현실'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한두 번만 칼을 휘두르는 손짓을 하면 수백 개의 파편으로 쪼개지는 일본군. 그곳에선 수많은 초등학생들과 유치원생들이 가상으로 조선의 수군이 되어 열심히도 싸우고 있더라. 이게 대체 무엇을 위한 가상현실인지. 대관절 아우슈비츠 기념관에 가도 이런 가상현실이 있을까, 수백 년을 압제당한 IT강국 인도에 가면 영국인을 때려 부수는 가상현실 프로그램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