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나도 자신 없다. 만약 내가 서울대를 졸업하고 검찰에 들어가 부잣집 딸과 결혼할 수 있다면, 나름 정의의 검을 휘두르며 기업·정치인들을 줄줄이 기소할 수 있다면, 나의 지조와 신념은 돈과 권력 앞에 눈 녹듯 녹아내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두렵다. 16년이라는 세월 동안 무한경쟁에 내몰려 끝내 그 승자독식의 법칙을 내면화하고 마는 학생들이. 오늘도 집, 학교, 학원을 오가며 성공만을 위해 질주하고 있을 젊은이들이. 강용석을 존경하고 이희진에 열광했던 그대들이.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우리들이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퇴진' 요구가 터져 나오고 있는 한편으로, 일각에선 그야말로 '아무말 대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현재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분노와 조롱의 한편에는 소수자에 대한 비하/혐오 정서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정서의 한 가운데에는 '발달장애/정신장애'에 대한 혐오도 존재한다. 특히, 소위 '심리학자'라는 자들이 박근혜를 정신장애 또는 발달장애라고 단정지으며, 자신의 장애혐오 정서를 여과 없이 노출시키고 있는 것은 매우 문제적이다.
우리가 맞서고 있는 상대는, 지배와 억압이 아니라 간접적인 피해, 눈에 보이는 폭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았던 거짓과 잘못 사용된 권력이다. 군사정권의 폭압이 아니라, 부드러워 보였던 공주의 무능에 대한 분노다. 그렇다면 당연히 시위 양상도 달라야 하지 않을까. 분노는 꼭 폭력으로만 표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박근혜가 두려워 하는 건 힘이 아니라 숫자일 터. 여성, 아이, 혹은 장애를 가진, 힘에서 밀리는 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위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30년 후의 시위"다워지지 않을까. 가진 힘을 쓰지 않는 영웅들이 있는 데모.
6.25 전쟁 이후 군부정권의 종식까지 우리 사회는 상시적 계엄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도 87년 개헌부터 30년 동안 계엄은 잊고 살았다. 잊을 정도가 아니라 계엄 정치와는 아주 멀리 멀리 떠나와 있다. 계엄은 한국의 민주주의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보다도 더 어렵다던 암울한 시절에나 횡행할 수 있었던 것이었지 지금은 언급조차 해서도 안 될 야만적 통치방식이다. 이참에 우리 국민들은 헌법이 정한 계엄 규정을 살펴보면 좋겠다. 한 번만 읽어봐도 현 시국이 계엄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과, 만약 특정 집단이 정권수호차원에서 계엄을 꿈꾼다면 그것은 명백한 헌법 위반일 뿐만 아니라, 형법상의 내란행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북부흰코뿔소는 흰코뿔소의 두 아종 중 하나로 심각한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2015년 11월22일, 미국 샌디에이고 사파리 공원에 살던 41살 암컷 '놀라'의 죽음 이후 오직 세 마리만 세상에 남았다. 케냐 올페제타(Ol Pejeta) 보호구역에 살고 있는 42살 수컷 '수단', 암컷 '나진'과 '파투'가 마지막 남은 북부흰코뿔소이다. 이들은 기승을 부리고 있는 밀렵 때문에 24시간 무장 경비원의 보호를 받는다.
현재 논의가 대통령 책임을 묻는 방식에 집중되면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놓치고 있다. 비서실장 스스로 실토했듯이 봉건시대에나 가능한 일이 어떻게 21세기 세계 10위권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수 있었을까? 최소한의 분별력에 대한 의문을 낳고 있는 대통령이 어떻게 현재의 대통령까지 오를 수 있었고, 이제서야 민낯이 드러났을까라는 질문이다. 최씨 비선실세 게이트가 가능할 수 있었던 책임의 한 축은 새누리당이고, 다른 한 축은 검찰이다.
구글 번역기가 믿기 어려울 만큼 장족의 발전을 했다. 한글 이메일도 한번 영문으로 번역해봤다. 된다. 외국업체가 보내온 영문 이메일도 한글로 돌려봤다. 거의 이해된다. 정말 예전엔 30-40%라면 이젠 80-90%까지 온 것 같다. 놀랍다. 그리고 고맙다, 구글. 미국, 실리콘 밸리의 저력에 또 한 번 놀란다. 그러면 여기서 이제 영어공부는 안 해도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아니면 번역가들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수능 때면 종종 보곤 하는 글이 '학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라는 글이다. 그런데 보통 보면 그런 말 하시는 분들의 학벌이 좋은 경우가 많았다. 가져본 자로서 어드벤티지를 못 누렸다는 얘긴데 원래 어드벤티지는 누리는 사람은 막상 그게 애초부터 주어진 것이라 그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원래 어드벤티지란 그렇다.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가 나라는 개인을 정의하진 않으나 어울릴 수 있는 인맥풀과 그룹의 범위를 정의해준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어드벤티지다.
앉아서 공부하느라 소화는 잘 안 되는데 식욕은 왕성하고, 운동은 할 짬이 없고, 체력은 떨어지고. 치마 후크는 안 잠긴 지 오래, 후크는 고사하고 지퍼도 이제 반 밖에 안 올라가는데 속 모르는 학생주임 선생님은 아래에 트레이닝복 입었다고 야단하시더라. 지금부터 게임을... 아니, 다이어트를 시작하지. 라고 결정하고 헬스장 문을 들어선 순간, 고3 특별 할인으로 3개월을 등록하라는 유혹을 받게 될 거야. 트레이너가 기구 사용법도 알려주고 카톡으로 식단 조절하라고 채찍질도 해 주니 처음엔 살이 정말 빠지는 기분일 거야.
지난 대국민담화를 통해 검찰 조사에 성실하게 임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이 돌연 태도를 바꿔 수사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호위무사에 둘러싸여 버티고, 야당은 내부 갈등을 벌이고 있지만 오히려 국민들은 성숙한 자세로 '퇴진'이라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단계는 국민의 힘을 모아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잘못을 저지른 정치인들을 정죄하고 정치개혁으로까지 나아갔던 국민 조직, 에스토니아의 '민회(Rahvakogu)'를 소개합니다. 에스토니아 민회는 제도정치권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국민의 힘을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을 선보였습니다.
슬프게도, 현 대통령은 자신이 차지하고 누리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고분고분하지 않는데도 좌절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지금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이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확신을 가진 것 같아 무섭다. 진심으로 묻고 싶다. 당신에게 대통령은 '직업'이냐고. 그 자리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소명이 당신에게 있기나 하냐고. 언제나 그렇듯 당신은 답하지 않을 것이기에, 우리가 먼저 답을 해야할 것 같다. 대통령은 직업이다. 그것도 소명의식이 필요한 중요한 직업이다. 무능한 데다 부패하기까지 했다면, 물러나 죄에 맞는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당신은 이미, 대통령이 아니다.
"지금 촛불 집회가 거세 보이지만, 미국 대선에서처럼 이른바 '샤이 트럼프(Shy Trump·공개적으로 트럼프를 지지하지 못했지만 트럼프를 뽑은 사람들)'들도 많다고 보고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드러나지 않은 'Shy 박근혜' 층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박 대통령에 빌붙어 그들이 가진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인사들이다.
민주당이 임명했던 긴즈버그 대법관이 83세이고, 브라이어 대법관이 78세이기 때문이다. 가끔 리버럴 쪽에 의견을 내는 케네디 대법관도 80세이다. 계산해 보자. 이들이 조만간 은퇴한다고 했을 때, 미국 대법관 구성은 '보수:리버럴'이 7:2로 바뀔 수 있다.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낙태를 합법화했던 1973년의 Roe v. Wade 판례를 트럼프 시기에 뒤집을 수 있는지, 즉, 낙태를 다시 불법화할 수 있는지의 논쟁이다. 트럼프는 취임하자마자 판례를 뒤엎겠다고 공약했었다. 가능할까?
국민은 자녀로 은유될 수 없다. 대통령이 아버지 역할을 맡은 것이 아니며, 공화정이 어머니인 것도 아니다. 국가는 가정의 확장판이 아니다. 언론과 지식인들이 시국을 개탄하는 목소리를 내준 용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응원한다. 하지만 대통령의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을 존중하자는 변호사를 포함하여 모든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여자 대통령을 공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가.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말이다. 분명히 망해도 여러 번 망했어야 할 만큼 잘못된 것들이 거의 청산되지 않은 후진 현대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복해내고 자랑할 만한 유산을 만들어낸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는 언뜻 주위가 산만하고 쉽게 좌절하거나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명백한 끓는점을 가지고 있다. 이 끓는점에 도달하면 우리 공동체는 반드시 일어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다시, 그 끓는점이다.
"대통령은 헌법이 부여한 지켜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고, 박 대통령은 아마 목숨을 내놓고라도 지키겠다는 입장" 청와대 관계자라는 자가 한 말이다. 이명박, 박근혜 치하에서 기상천외한 일들은 죄다 겪었지만, 헌법을 송두리째 파괴한 자가 그 헌법을 목숨을 내놓고라도 지키겠다는 소리보다 더 황당한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정신이 병리적 상태가 아니라는 전제 아래 이런 발언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독법은 "내가 곧 헌법이고, 헌법이 곧 나다"라는 발상뿐이다. 마치 절대왕정 시대의 절대군주가 "짐이 곧 국가"라고 천명했듯 말이다.
이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지 몇년쯤 되었다. 인터넷의 댓글창엔 온통 '적의'만 가득해 보였다. '선동질'이나 '좌좀', '씹선비', 그리고 또 많은 혐오와 적대감의 표현들...... 인터넷 댓글을 곧장 여론과 동일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몇년 동안 이런 혐오 표현들에 노출되면서 나는 우리 사회에 '연대'라는 것이 과연 가능이나 할지, 정의를 말하고 옳은 일을 추구하려는 많은 행위들이 점차 고립되고 분쇄되어가고만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좌절해, 한참 동안 주먹을 꽉 쥐고 있곤 했다. '헬조선'이라는 키워드가 가히 현실 그 자체라고 생각했고 '청년들은 좌절하지 말고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늙은이들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탈선'은 가해 지목자에 대한 언론의 선정적인 스포트라이트는 상당한 데 비해, 피해생존자들과 지지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공론장이 없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연대성명 발표의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면 그에 대한 고발자들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다. 피해생존자의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 역시 허다했다.
정호성은 1998년에 박근혜의 비서가 됐다. 겨우 서른 살 즈음이다. 그는 그 시절부터 단 한 번도 옆을 돌아보지 않고 박근혜의 곁을 지켰다. 박근혜를 추종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의 관심과 영광과 위대함을 무너뜨리는 가장 거대한 구멍이 되어버린 정호성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보도에 따르면 정호성은 검찰 조사 중 여러차례 눈물을 쏟았다. 압수당한 자신의 휴대폰에서 대통령에게 불리한 증거가 나올 것을 걱정해서 울었다고 했다. 그 눈물은 적어도 그에게는 악의가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