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편집]
권율은 임진왜란 초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이치 전투와 독성산성 전투 등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웅거하며 명군과 합세해서 한양을 탈환하려다 조명연합군이 벽제관에서 대패하여 평양으로 돌아감으로써 고립 상태에 빠졌다.
한편 일본군은 총퇴각을 하던 중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을 대파하고 한양에 머물게 되었다.
전투 과정[편집]
권율은 1593년 음력 2월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에게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였다. 이때 의병장 김천일과 승병장 처영의 병사들도 합세하여 총병력은 2,800여명에 이르렀다.
행주산성의 지형은 전방만 뚫려 있으며 후방에 한강이 흐르고 있었으므로 배수진이 되었다. 일본군은 오직 전방에서만 공격이 가능했다. 행주산성의 군민들은 만 명의 본대와 휘하 다이묘들을 이끌고 공격해 온 우키다 히데이에의 일본군을 맞아 바위, 화살, 불덩이, 끓는 물을 퍼부어 최소 400명에서 최대 5000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 및 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에게 모두 부상을 입히고 격퇴하였다. 특히 우키타 히데이에는 중상을 입고 죽을 위기에 몰렸으나 부하 병사들이 우키타 히데이에를 업고 뛰어서 도망친 덕택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때 성내의 아녀자들이 치마 위에 짧은 덧치마를 대어 적군들에게 던질 돌덩이를 운반한 것이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1527년(중종 12년) 최세진이 편찬한 사성통해(四聲通解)에 의하면 임진왜란 전부터 행주치마라는 단어가 존재했다는 점으로 볼때 이는 잘못되었다. 또한 이때 조선군의 신무기인 화차와 비격진천뢰도 맹활약한 바 있다. 행주대첩은 한산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빛난다. 권율은 이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탈영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어 어마(御馬)까지 하사받았다.
설명출처:위키백과
- published: 01 Jun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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