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rah Bakewell is an author of fiction and non-fiction. She currently lives in Clapham, in south London, writing and working as a part-time cataloger of rare books at the National Trust in London.
Bakewell was born in the seaside town of Bournemouth, England, where her parents ran a guest house. When she was five, the family began traveling through India in a camper, and continued to do so for two years before settling in Sydney, Australia. There, her father worked as a bookseller and her mother worked as a librarian. She was educated at Essex University in England, and spent some of her young adulthood working in bookstores.
The first readings that especially interested Bakewell included Kafka’s short stories and Thomas Bernhard’s collection of 104 micro-narratives, The Voice Imitator, and she calls The Land of the Thinsies, by Dorothy Ann Lovell "one of her first loves." Now, however, she says she has "a thing about monster-books – the kinds that make outrageous demands on the reader and defiantly outstay their welcome."
구로다 요시타카(칸베에)의 임진왜란
분로쿠(文祿) 원년(1592년) 임진왜란에도 참가하여 주요 성곽의 수호 등과 제2차 진주 성 전투에 참가하여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龜甲車) 등의 설계에도 참여했으나, 분로쿠 2년(1593년)에 5봉행 중 한 명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다툼이 일어난 것이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에 출가, 은거하여 조스이엔쿄(如水円清)란 호을 사용하였다. 그 후에는 나카쓰 성에서 유유자적한 은거생활을 보내었다고 한다.
6:39
[1592년]사천해전 - Battle of Sacheon(泗川海戰)
[1592년]사천해전 - Battle of Sacheon(泗川海戰)
[1592년]사천해전 - Battle of Sacheon(泗川海戰)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42척의 전선을 격침당한 왜군은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 북상을 기도하였다. 1592년 7월 8일(음력 5월 29일) 이순신은 판옥선 40여 척을 거느리고 거제를 출발하여[2]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여 사천 선창에 있는 왜군의 정보를 물어 사천으로 추격하였다.
왜군은 사천으로 상륙하여 배는 산 밑에 매어두고 산위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해안가에 정박하고 있던 이순신은 단병접전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처음으로 유인작전을 사용하게 된다. 육지에 대기 중이던 왜군이 승선하여 조선 수군 함대를 쫓아오자 바다에서 뱃머리를 돌려 반격으로 나섰다.
선두는 역시 거북선. 거북선 돌격장인 이언량,이기남이 거북선을 지휘을 하고 돌격하며 왜 수군 사이로 헤집고 다니자 판옥선들이 후미에서 화포 공격을 하며 그 뒤를 따랐다. 결과는 적 함대 13척 모두 격침.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왼쪽 어깨에 총을 맞지만, 마친 후 부하를 시켜 칼끝으로 총탄을 파내게 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의 결과 왜군은 패하여 부산과 거제도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선조는 이 전투의 승리로 이순신에게는 정2품인 정헌대부(正憲大夫)의 벼슬을 하사하였고, 이억기와 원균
7:43
[1592년]용인 전투 - Battle of Yongin(龍仁戦闘)
[1592년]용인 전투 - Battle of Yongin(龍仁戦闘)
[1592년]용인 전투 - Battle of Yongin(龍仁戦闘)
일본군에게 빼앗긴 서울을 되찾기 위해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도내 관군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병마절도사 최원(崔遠)으로 전라도를 지키게 하였다.
자신은 4만의 관군을 이끌고 나주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고 전 부사 이시지를 선봉장에 임명해 용안강(龍安江)을 건너 충청도 임천역(林川驛)으로 진출하였다.
전라도방어사 곽영(郭嶸)은 2만의 관군을 거느리고,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중위장으로 삼고 전 부사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장으로 삼아 여산(礪山) 대로를 지나 금강을 건넜다.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는 부하 몇백 명을 인솔하고 충청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도 몇만의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1592년(선조 25) 5월 26일 경기도 진위(振威 :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 모이니 하삼도의 관군은 ‘호왈십만(號曰十萬)’이라 하여 그 위세가 당당하였다.
6월 3일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수원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은 조선의 관군이 갑자기 밀어닥치는 것을 보고 도망쳐 용인에 주둔한 일본군과 합쳤다. 삼도의 관군은 군세가 우세한 전라도관찰사 이광이 맹주가 되어 전 군을 지휘하였다.
이 때 용인·수원 등지에는 일본 수군장수 와키사카(脇坂安治) 휘하의 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와키사카는 해전에서 불리하니
64:26
Alessandro Striggio (c.1536-1592 ) - Mass for 40 and 60 voi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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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ssandro Striggio (c.1536-1592)
Mass for 40 and 60 voices
A SERVICE FOR ST JOHN THE BAPTIST IN FLORENCE
Processio
01 PLAINCHANT (ANON.): Beata viscera 3:31
Oratio
02 ORAZIO BENEVOLI (1605-1672): Laetatus sum 5:41
03 ORAZIO BENEVOLI: Miserere 3:47
Introitus
04 FRANCESCO CORTECCIA (1502-1571): Bonum est confiteri Domino 0:45
05 FRANCESCO CORTECCIA: Gloria Patri 1:10
Kyrie
06 ALESSANDRO STRIGGIO: Kyrie from Missa sopra Ecco sì beato giorno 3:49
Gloria
07 ALESSANDRO STRIGGIO: Gloria from Missa sopra Ecco sì beato giorno 5:45
Graduale
08 FRANCESCO CORTECCIA: Alleluia 0:50
Credo
09 ALESSANDRO STRIGGIO: Credo from Missa sopra Ec
12:27
[1592년]일본군의 조선출정(임진왜란) - Japanese invasions of Korea outbreak(文禄・慶長の役の発生)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1592년]일본군의 조선출정(임진왜란) - Japanese invasions of Korea outbreak(文禄・慶長の役の発生)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1592년]일본군의 조선출정(임진왜란) - Japanese invasions of Korea outbreak(文禄・慶長の役の発生)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 3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구별하여 부른다. 한편 한국에서 '조일전쟁, 임진전쟁'이라 부르기도 하며, 일본에서는 당시 연호를 따서 문록·경장의 역(일본어: 文禄・慶長の役 분로쿠게이초노에키[*])이라 하며,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당시 명(明) 황제였던 만력제의 호를 따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
설명출처:위키백과
8:19
[1592년]한산도 대첩(해전) - Battle of Hansan Island(閑山島海戦) 1편
[1592년]한산도 대첩(해전) - Battle of Hansan Island(閑山島海戦) 1편
[1592년]한산도 대첩(해전) - Battle of Hansan Island(閑山島海戦) 1편
한산도 대첩 1편입니다.(한산도 대첩 2편:http://www.youtube.com/watch?v=qJ5cRX-ZGhQ)
1592년(선조 25) 4월 왜군은 수륙병진계획으로 조선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그들 수군이 남해·서해로 침범하던 중 옥포(玉浦)·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지에서 연전연패하였다. 그러자 수군의 유능한 장수였던 와키사카(脇坂安治)는 정예병력을 늘려 73척을 이끌고 거제도 등지를 침범하였다. 수군장수였던 구키(九鬼嘉隆)도 42척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왜수군들의 동향을 탐지한 이순신은 7월 5일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다. 다음 날인 7월 6일 본영을 출발해 노량(露梁 :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이르러 원균이 이끌고 온 7척과 합세하니 3도의 전선은 모두 55척이었다.
7일 저녁 당포 앞바다에 이르러 목동 김천손(金千孫)에게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 :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8일 한산섬 앞바다에 이르러 이를 확인하였다. 그 때 왜수군의 세력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서 지휘관은 수군장수 와키사카였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板
30:13
The East Asian War, 1592-1598: International relations, violence and memory
The East Asian War, 1592-1598: International relations, violence and memory
The East Asian War, 1592-1598: International relations, violence and memory
As East Asia regains its historical position as a world centre, information on the history of regional relations becomes ever more critical. Astonishingly, Northeast Asia enjoyed five centuries of international peace from 1400 to 1894, broken only by one major international war – the invasion of Korea in the 1590s by Japan’s ruler Toyotomi Hideyoshi. This war involved Koreans, Japanese, Chinese, Southeast Asians, and Europeans; it saw the largest overseas landing in world history up to that time and devastated Korea. It also highlighted the nature of the strategic balance in the region, presenting China’s Ming dynasty with a serious threat th
8:43
[1592년]경주성 전투 - Battle of Gyeongju(慶州-)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1592년]경주성 전투 - Battle of Gyeongju(慶州-)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1592년]경주성 전투 - Battle of Gyeongju(慶州-)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임진왜란 때인 1592년 9월 8일 경상좌병사 박진이 왜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경주성을 탈환한 전투.
이에 앞서 박진은 8월 20일 경주성을 공격하다가 패배하고 안강의 본진에 돌아가 있었는데, 그는 재차 경주 탈환을 결의하고 새로운 무기 개발을 모색하였다. 이때 마침 화포장 이장손(李長孫)이 새로운 무기를 발명하였는데, 이것은 쇠조각과 화약을 섞어서 둥그렇게 만든 다음 표면을 쇠로 입힌 후 대완구포로 발사하면 5, 6백보 정도 날아가서 땅에 떨어졌다가 잠시 후에 폭발하는 것이었다. 박진은 이것을 비격진천뢰라 이름붙이고 이를 이용하여 경주성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9월 8일 해가 지자 박진은 선봉대 1,000여명으로 성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성에 접근하였다. 이때 성 안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소속 왜군 수천 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군의 야간공격을 알아차리고 조총을 쏘며 조선군의 접근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에 박진의 군대는 은밀히 성 밑에 접근하여 비격진천뢰 수발을 발사 적군을 폭사시켰고, 이에 놀란 왜군은 좌왕우왕하다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근 1만석의 군량을 버린 채 이튿날 울산 서생포 방면으로 퇴각하였으며, 마침내 경주성은 수복되었다. 그 뒤로 왜군은 비격진천뢰를 두려워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이 경주전
16:41
Michel de Montaigne (1533-1592) Sarah Bakewell interview
Michel de Montaigne (1533-1592) Sarah Bakewell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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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hilosophybites.com/ Montaigne cultivates his liberty by not adhering exclusively to any one idea, while at the same time exploring them all. In e...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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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ral Lee Sun-shin 1592-1598 (13 vs 300) english 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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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Sun-shin or Yi Sun-shin (April 28, 1545 -- December 16, 1598, Korean: 이순신, Hanja: 李舜臣) was a Korean naval commander, famed for his victories against the ...
42:04
Michel de Montaigne (1533-1592)
Michel de Montaigne (1533-1592)
Michel de Montaigne (1533-1592)
http://www.iep.utm.edu/montaign/ Michel de Montaigne is widely appreciated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figures in the late French Renaissance, both for his ...
2:42
Learn Excel 2013 - "The Excel App Store": Podcast #1592 Part V of V
Learn Excel 2013 - "The Excel App Store": Podcast #1592 Part V of V
Learn Excel 2013 - "The Excel App Store": Podcast #1592 Part V of V
Well... all this week Bill has been reviewing and highlighting some interesting features that are available in Excel 2013: Ease of access to utilities and we...
구로다 요시타카(칸베에)의 임진왜란
분로쿠(文祿) 원년(1592년) 임진왜란에도 참가하여 주요 성곽의 수호 등과 제2차 진주 성 전투에 참가하여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龜甲車) 등의 설계에도 참여했으나, 분로쿠 2년(1593년)에 5봉행 중 한 명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다툼이 일어난 것이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에 출가, 은거하여 조스이엔쿄(如水円清)란 호을 사용하였다. 그 후에는 나카쓰 성에서 유유자적한 은거생활을 보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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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사천해전 - Battle of Sacheon(泗川海戰)
[1592년]사천해전 - Battle of Sacheon(泗川海戰)
[1592년]사천해전 - Battle of Sacheon(泗川海戰)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42척의 전선을 격침당한 왜군은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 북상을 기도하였다. 1592년 7월 8일(음력 5월 29일) 이순신은 판옥선 40여 척을 거느리고 거제를 출발하여[2]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여 사천 선창에 있는 왜군의 정보를 물어 사천으로 추격하였다.
왜군은 사천으로 상륙하여 배는 산 밑에 매어두고 산위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해안가에 정박하고 있던 이순신은 단병접전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처음으로 유인작전을 사용하게 된다. 육지에 대기 중이던 왜군이 승선하여 조선 수군 함대를 쫓아오자 바다에서 뱃머리를 돌려 반격으로 나섰다.
선두는 역시 거북선. 거북선 돌격장인 이언량,이기남이 거북선을 지휘을 하고 돌격하며 왜 수군 사이로 헤집고 다니자 판옥선들이 후미에서 화포 공격을 하며 그 뒤를 따랐다. 결과는 적 함대 13척 모두 격침.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왼쪽 어깨에 총을 맞지만, 마친 후 부하를 시켜 칼끝으로 총탄을 파내게 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의 결과 왜군은 패하여 부산과 거제도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선조는 이 전투의 승리로 이순신에게는 정2품인 정헌대부(正憲大夫)의 벼슬을 하사하였고, 이억기와 원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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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용인 전투 - Battle of Yongin(龍仁戦闘)
[1592년]용인 전투 - Battle of Yongin(龍仁戦闘)
[1592년]용인 전투 - Battle of Yongin(龍仁戦闘)
일본군에게 빼앗긴 서울을 되찾기 위해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도내 관군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병마절도사 최원(崔遠)으로 전라도를 지키게 하였다.
자신은 4만의 관군을 이끌고 나주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고 전 부사 이시지를 선봉장에 임명해 용안강(龍安江)을 건너 충청도 임천역(林川驛)으로 진출하였다.
전라도방어사 곽영(郭嶸)은 2만의 관군을 거느리고,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중위장으로 삼고 전 부사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장으로 삼아 여산(礪山) 대로를 지나 금강을 건넜다.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는 부하 몇백 명을 인솔하고 충청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도 몇만의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1592년(선조 25) 5월 26일 경기도 진위(振威 :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 모이니 하삼도의 관군은 ‘호왈십만(號曰十萬)’이라 하여 그 위세가 당당하였다.
6월 3일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수원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은 조선의 관군이 갑자기 밀어닥치는 것을 보고 도망쳐 용인에 주둔한 일본군과 합쳤다. 삼도의 관군은 군세가 우세한 전라도관찰사 이광이 맹주가 되어 전 군을 지휘하였다.
이 때 용인·수원 등지에는 일본 수군장수 와키사카(脇坂安治) 휘하의 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와키사카는 해전에서 불리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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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ssandro Striggio (c.1536-1592 ) - Mass for 40 and 60 voi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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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s for 40 and 60 voices
A SERVICE FOR ST JOHN THE BAPTIST IN FLORENCE
Processio
01 PLAINCHANT (ANON.): Beata viscera 3:31
Oratio
02 ORAZIO BENEVOLI (1605-1672): Laetatus sum 5:41
03 ORAZIO BENEVOLI: Miserere 3:47
Introitus
04 FRANCESCO CORTECCIA (1502-1571): Bonum est confiteri Domino 0:45
05 FRANCESCO CORTECCIA: Gloria Patri 1:10
Kyrie
06 ALESSANDRO STRIGGIO: Kyrie from Missa sopra Ecco sì beato giorno 3:49
Gloria
07 ALESSANDRO STRIGGIO: Gloria from Missa sopra Ecco sì beato giorno 5:45
Graduale
08 FRANCESCO CORTECCIA: Alleluia 0:50
Credo
09 ALESSANDRO STRIGGIO: Credo from Missa sopra 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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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일본군의 조선출정(임진왜란) - Japanese invasions of Korea outbreak(文禄・慶長の役の発生)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1592년]일본군의 조선출정(임진왜란) - Japanese invasions of Korea outbreak(文禄・慶長の役の発生)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1592년]일본군의 조선출정(임진왜란) - Japanese invasions of Korea outbreak(文禄・慶長の役の発生)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 3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구별하여 부른다. 한편 한국에서 '조일전쟁, 임진전쟁'이라 부르기도 하며, 일본에서는 당시 연호를 따서 문록·경장의 역(일본어: 文禄・慶長の役 분로쿠게이초노에키[*])이라 하며,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당시 명(明) 황제였던 만력제의 호를 따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
설명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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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한산도 대첩(해전) - Battle of Hansan Island(閑山島海戦) 1편
[1592년]한산도 대첩(해전) - Battle of Hansan Island(閑山島海戦) 1편
[1592년]한산도 대첩(해전) - Battle of Hansan Island(閑山島海戦) 1편
한산도 대첩 1편입니다.(한산도 대첩 2편:http://www.youtube.com/watch?v=qJ5cRX-ZGhQ)
1592년(선조 25) 4월 왜군은 수륙병진계획으로 조선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그들 수군이 남해·서해로 침범하던 중 옥포(玉浦)·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지에서 연전연패하였다. 그러자 수군의 유능한 장수였던 와키사카(脇坂安治)는 정예병력을 늘려 73척을 이끌고 거제도 등지를 침범하였다. 수군장수였던 구키(九鬼嘉隆)도 42척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왜수군들의 동향을 탐지한 이순신은 7월 5일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다. 다음 날인 7월 6일 본영을 출발해 노량(露梁 :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이르러 원균이 이끌고 온 7척과 합세하니 3도의 전선은 모두 55척이었다.
7일 저녁 당포 앞바다에 이르러 목동 김천손(金千孫)에게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 :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8일 한산섬 앞바다에 이르러 이를 확인하였다. 그 때 왜수군의 세력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서 지휘관은 수군장수 와키사카였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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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ast Asian War, 1592-1598: International relations, violence and memory
The East Asian War, 1592-1598: International relations, violence and memory
The East Asian War, 1592-1598: International relations, violence and memory
As East Asia regains its historical position as a world centre, information on the history of regional relations becomes ever more critical. Astonishingly, Northeast Asia enjoyed five centuries of international peace from 1400 to 1894, broken only by one major international war – the invasion of Korea in the 1590s by Japan’s ruler Toyotomi Hideyoshi. This war involved Koreans, Japanese, Chinese, Southeast Asians, and Europeans; it saw the largest overseas landing in world history up to that time and devastated Korea. It also highlighted the nature of the strategic balance in the region, presenting China’s Ming dynasty with a serious threat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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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경주성 전투 - Battle of Gyeongju(慶州-)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1592년]경주성 전투 - Battle of Gyeongju(慶州-)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1592년]경주성 전투 - Battle of Gyeongju(慶州-)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임진왜란 때인 1592년 9월 8일 경상좌병사 박진이 왜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경주성을 탈환한 전투.
이에 앞서 박진은 8월 20일 경주성을 공격하다가 패배하고 안강의 본진에 돌아가 있었는데, 그는 재차 경주 탈환을 결의하고 새로운 무기 개발을 모색하였다. 이때 마침 화포장 이장손(李長孫)이 새로운 무기를 발명하였는데, 이것은 쇠조각과 화약을 섞어서 둥그렇게 만든 다음 표면을 쇠로 입힌 후 대완구포로 발사하면 5, 6백보 정도 날아가서 땅에 떨어졌다가 잠시 후에 폭발하는 것이었다. 박진은 이것을 비격진천뢰라 이름붙이고 이를 이용하여 경주성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9월 8일 해가 지자 박진은 선봉대 1,000여명으로 성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성에 접근하였다. 이때 성 안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소속 왜군 수천 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군의 야간공격을 알아차리고 조총을 쏘며 조선군의 접근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에 박진의 군대는 은밀히 성 밑에 접근하여 비격진천뢰 수발을 발사 적군을 폭사시켰고, 이에 놀란 왜군은 좌왕우왕하다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근 1만석의 군량을 버린 채 이튿날 울산 서생포 방면으로 퇴각하였으며, 마침내 경주성은 수복되었다. 그 뒤로 왜군은 비격진천뢰를 두려워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이 경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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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 de Montaigne (1533-1592) Sarah Bakewell interview
Michel de Montaigne (1533-1592) Sarah Bakewell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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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hilosophybites.com/ Montaigne cultivates his liberty by not adhering exclusively to any one idea, while at the same time exploring them all. In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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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ral Lee Sun-shin 1592-1598 (13 vs 300) english version
Admiral Lee Sun-shin 1592-1598 (13 vs 300) english version
Admiral Lee Sun-shin 1592-1598 (13 vs 300) english version
Lee Sun-shin or Yi Sun-shin (April 28, 1545 -- December 16, 1598, Korean: 이순신, Hanja: 李舜臣) was a Korean naval commander, famed for his victories against th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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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 de Montaigne (1533-1592)
Michel de Montaigne (1533-1592)
Michel de Montaigne (1533-1592)
http://www.iep.utm.edu/montaign/ Michel de Montaigne is widely appreciated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figures in the late French Renaissance, both for his ...
2:42
Learn Excel 2013 - "The Excel App Store": Podcast #1592 Part V of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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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all this week Bill has been reviewing and highlighting some interesting features that are available in Excel 2013: Ease of access to utilities and we...
14:43
임진왜란 1편 8천 조선군, 왜군 16만 대군에 맞서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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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1편 8천 조선군, 왜군 16만 대군에 맞서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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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 N Watson Way Eagle, ID 83616
1592 N Watson Way Eagle, ID 83616
1592 N Watson Way Eagle, ID 83616
Listing Agent: Tim Burroughs
Contact: 208-409-7653
Listing Website: http://isellboisehomes.com/
Keller Williams Realty Boise
Address: 1592 N Watson Way Eagle, ID 83616
MLS #98564300
Bedrooms: 4
Bathrooms: 3.5
Square Feet:4354
Subdivision: Brookwood (Eagle)
Remarks:
Welcome to this spectacular home in desirable Brookwood! Sweeping staircase, gorgeous millwork, soaring ceilings, upgrades galore! Spacious kitchen w/center island & granite countertops overlook fabulous Great Room & Casual Dining. Large main-level Master Suite w/fireplace has elegant Master Bath w/jetted tub & sep shower, huge walk-in closet. Lg. Bonus Room off Bdm #3. Fabulous
6:01
The Battle of Okpo AD 1592 Imjin War (Joseon & Wokou) 《조선 왜구 옥포해전 玉浦海戰》 1/3
The Battle of Okpo AD 1592 Imjin War (Joseon & Wokou) 《조선 왜구 옥포해전 玉浦海戰》 1/3
The Battle of Okpo AD 1592 Imjin War (Joseon & Wokou) 《조선 왜구 옥포해전 玉浦海戰》 1/3
옥포 해전(玉浦海戰)은 1592년(선조 25)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 경남 거제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룬 전승신화의 첫 승전이다. 전투 의의 전쟁 발발 후 조...
3:40
Team 1592 - QF2 - Alamo Regional
Team 1592 - QF2 - Alamo Regional
Team 1592 - QF2 - Alamo Regional
QF2 - (Win 73-43)
6:27
The Battle of Tangeumdae AD 1592 Imjin War (Shin Rip vs Konishi Yukinaga) 《조선 왜구 탄금대 전투 忠州彈琴臺戰鬪》
The Battle of Tangeumdae AD 1592 Imjin War (Shin Rip vs Konishi Yukinaga) 《조선 왜구 탄금대 전투 忠州彈琴臺戰鬪》
The Battle of Tangeumdae AD 1592 Imjin War (Shin Rip vs Konishi Yukinaga) 《조선 왜구 탄금대 전투 忠州彈琴臺戰鬪》
충주 탄금대 전투(忠州彈琴臺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전멸한 전투이다.
배경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서 부산진성에 이어 동래성마저 함락되고 동래부사 송상현이 전사하자 조정에서는 긴급대책을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저 몇십명만 이끌고 와서 재물이나 조금 약탈하고 자기네 땅으로 되돌아갔던 기존의 왜구들과는 차원이 다른 전란에 직면한 조선에서는 일단 경상도순변사 이일을 파견해보지만 상주에서 이일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났으므로 상주마저 함락되었다. 이 전에 선조는 당시 조선에서 최고의 명장 대우를 받고 있던 신립으로 하여금 왜군을 방어하는 임무를 부여함과 동시에 상방검을 하사하여 신립에게 선조 자신과 같은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 신립은 문경으로 출동하게 되었다.
신립군의 규모
조선군의 숫자에 대해서는 징비록에서는 8천 정예 병력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록에 전하는 바는 이와 다르며,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 '일본사'에 탄금대 전투 당시 신립군의 숫자를 8만이라 적고 전투 상황을 조선 기록들과는 달리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전투준비
1592년 4월 26일 충주에 도착한 신립의 수천 기병은 단월역에 주둔하고 상주에서 패전한 이일을 만나게된다. 이때 종사관 김여물이 신립에게 새재의 높은 언덕에서 궁병
1:55
MVI 1592 copy
MVI 1592 co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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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Team 1592 - Match 1 - Alamo Regional
Team 1592 - Match 1 - Alamo Regional
Team 1592 - Match 1 - Alamo Regional
Match 1 - (Win 62-0)
2:29
Team 1592 - Match 26 - Alamo Regional
Team 1592 - Match 26 - Alamo Regional
Team 1592 - Match 26 - Alamo Regional
Match 26 - (Win 106-33)
3:58
Team 1592 - SF1 - Alamo Regional
Team 1592 - SF1 - Alamo Regional
Team 1592 - SF1 - Alamo Regional
SF1 - (Win 136-95)
10:19
1592 - "Vacant Lot" Live at Trowbridge House of Coffee
1592 - "Vacant Lot" Live at Trowbridge House of Coffee
1592 - "Vacant Lot" Live at Trowbridge House of Coffee
1592 plays an extended version of their hit Vacant Lot. Can you name the film in the background?
구로다 요시타카(칸베에)의 임진왜란
분로쿠(文祿) 원년(1592년) 임진왜란에도 참가하여 주요 성곽의 수호 등과 제2차 진주 성 전투에 참가하여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龜甲車) 등의 설계에도 참여했으나, 분로쿠 2년(1593년)에 5봉행 중 한 명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다툼이 일어난 것이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에 출가, 은거하여 조스이엔쿄(如水円清)란 호을 사용하였다. 그 후에는 나카쓰 성에서 유유자적한 은거생활을 보내었다고 한다.
구로다 요시타카(칸베에)의 임진왜란
분로쿠(文祿) 원년(1592년) 임진왜란에도 참가하여 주요 성곽의 수호 등과 제2차 진주 성 전투에 참가하여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龜甲車) 등의 설계에도 참여했으나, 분로쿠 2년(1593년)에 5봉행 중 한 명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다툼이 일어난 것이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에 출가, 은거하여 조스이엔쿄(如水円清)란 호을 사용하였다. 그 후에는 나카쓰 성에서 유유자적한 은거생활을 보내었다고 한다.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42척의 전선을 격침당한 왜군은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 북상을 기도하였다. 1592년 7월 8일(음력 5월 29일) 이순신은 판옥선 40여 척을 거느리고 거제를 출발하여[2]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여 사천 선창에 있는 왜군의 정보를 물어 사천으로 추격하였다.
왜군은 사천으로 상륙하여 배는 산 밑에 매어두고 산위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해안가에 정박하고 있던 이순신은 단병접전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처음으로 유인작전을 사용하게 된다. 육지에 대기 중이던 왜군이 승선하여 조선 수군 함대를 쫓아오자 바다에서 뱃머리를 돌려 반격으로 나섰다.
선두는 역시 거북선. 거북선 돌격장인 이언량,이기남이 거북선을 지휘을 하고 돌격하며 왜 수군 사이로 헤집고 다니자 판옥선들이 후미에서 화포 공격을 하며 그 뒤를 따랐다. 결과는 적 함대 13척 모두 격침.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왼쪽 어깨에 총을 맞지만, 마친 후 부하를 시켜 칼끝으로 총탄을 파내게 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의 결과 왜군은 패하여 부산과 거제도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선조는 이 전투의 승리로 이순신에게는 정2품인 정헌대부(正憲大夫)의 벼슬을 하사하였고, 이억기와 원균은 종2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2]
여담으로 이 전투에 참전한 왜군 선박 13척은 '누각과 같이 생긴' 이라는 말이 장계에 있어서 모두 아다케부네로 보는 사람들도 있으나, 아다케부네가 일본에서 매우 희소한 함선이었음을 고려하면 좀 큰 세키부네나 아니면 그냥 누각처럼 생긴 세키부네였을 확률이 높다.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42척의 전선을 격침당한 왜군은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 북상을 기도하였다. 1592년 7월 8일(음력 5월 29일) 이순신은 판옥선 40여 척을 거느리고 거제를 출발하여[2]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여 사천 선창에 있는 왜군의 정보를 물어 사천으로 추격하였다.
왜군은 사천으로 상륙하여 배는 산 밑에 매어두고 산위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해안가에 정박하고 있던 이순신은 단병접전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처음으로 유인작전을 사용하게 된다. 육지에 대기 중이던 왜군이 승선하여 조선 수군 함대를 쫓아오자 바다에서 뱃머리를 돌려 반격으로 나섰다.
선두는 역시 거북선. 거북선 돌격장인 이언량,이기남이 거북선을 지휘을 하고 돌격하며 왜 수군 사이로 헤집고 다니자 판옥선들이 후미에서 화포 공격을 하며 그 뒤를 따랐다. 결과는 적 함대 13척 모두 격침.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왼쪽 어깨에 총을 맞지만, 마친 후 부하를 시켜 칼끝으로 총탄을 파내게 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의 결과 왜군은 패하여 부산과 거제도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선조는 이 전투의 승리로 이순신에게는 정2품인 정헌대부(正憲大夫)의 벼슬을 하사하였고, 이억기와 원균은 종2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2]
여담으로 이 전투에 참전한 왜군 선박 13척은 '누각과 같이 생긴' 이라는 말이 장계에 있어서 모두 아다케부네로 보는 사람들도 있으나, 아다케부네가 일본에서 매우 희소한 함선이었음을 고려하면 좀 큰 세키부네나 아니면 그냥 누각처럼 생긴 세키부네였을 확률이 높다.
일본군에게 빼앗긴 서울을 되찾기 위해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도내 관군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병마절도사 최원(崔遠)으로 전라도를 지키게 하였다.
자신은 4만의 관군을 이끌고 나주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고 전 부사 이시지를 선봉장에 임명해 용안강(龍安江)을 건너 충청도 임천역(林川驛)으로 진출하였다.
전라도방어사 곽영(郭嶸)은 2만의 관군을 거느리고,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중위장으로 삼고 전 부사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장으로 삼아 여산(礪山) 대로를 지나 금강을 건넜다.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는 부하 몇백 명을 인솔하고 충청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도 몇만의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1592년(선조 25) 5월 26일 경기도 진위(振威 :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 모이니 하삼도의 관군은 ‘호왈십만(號曰十萬)’이라 하여 그 위세가 당당하였다.
6월 3일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수원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은 조선의 관군이 갑자기 밀어닥치는 것을 보고 도망쳐 용인에 주둔한 일본군과 합쳤다. 삼도의 관군은 군세가 우세한 전라도관찰사 이광이 맹주가 되어 전 군을 지휘하였다.
이 때 용인·수원 등지에는 일본 수군장수 와키사카(脇坂安治) 휘하의 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와키사카는 해전에서 불리하니 육전에 임하라는 명령을 받고 수군 1,600명을 거느리고 육상 경비를 맡고 있었다.
그 주력 1,000명은 서울에 주둔하였다. 잔여 600명은 부장(部將)인 와키사카와 와타나베(渡邊七右衛門) 등이 거느리고 용인 부근 북두문산(北斗門山)과 문소산(文小山) 등에 소루(小壘)를 만들어 지키고 있었다.
이광은 곽영과 권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봉장 이시지와 백광언으로 하여금 일본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조선 관군이 왕성한 것을 보고, 싸우지 않고 원병이 오기를 기다렸다. 주장 와키사카는 곧 휘하 병력을 이끌고 서울을 떠나 용인으로 향하였다.
원병이 도착하자 일본군은 공격 채비를 갖췄다. 백광언과 이시지는 무질서하게 선두에 서서 관군을 지휘하여, 갑작스러운 적의 기습을 막아내지 못하고 다른 장수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잔여 관군들은 이광의 본군(本軍)에 포함되어 함께 광교산 서쪽으로 진출해 진을 쳤다. 군의 사기는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충청도의 관군은 수원으로 전진해 먼저 이 방면의 일본군을 공격하고 연락선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4일 아침 용인 방면으로 철수했으므로, 군사를 돌려 전라도군과 힘을 합쳐 진지를 구축하였다.
6일 아침 이광은 다음 싸움을 위해 일제히 아침을 먹다가 불시에 일본 기병의 기습을 받고 대군이 일시에 무너졌다. 오직 권율만이 휘하 군을 온전히 이끌고 광주로 퇴각해, 그 뒤 7월 8일 배티[梨峙]싸움에서 대승할 수 있었다.
큰 기대를 걸었던 삼도근왕병(三道勤王兵)이 쉽게 무너지자 서울 수복의 꿈은 깨지고, 조선 전 군민(軍民)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이 싸움에서 대패한 죄로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전주로 돌아가 곧 파직되었다. 충청도관찰사 윤선각은 공주로, 경상도관찰사 김수는 경상우도로 돌아갔으며, 충청병사 신익(申翌)은 백의종군하였다.
설명출쳐: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본군에게 빼앗긴 서울을 되찾기 위해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도내 관군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병마절도사 최원(崔遠)으로 전라도를 지키게 하였다.
자신은 4만의 관군을 이끌고 나주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고 전 부사 이시지를 선봉장에 임명해 용안강(龍安江)을 건너 충청도 임천역(林川驛)으로 진출하였다.
전라도방어사 곽영(郭嶸)은 2만의 관군을 거느리고,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중위장으로 삼고 전 부사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장으로 삼아 여산(礪山) 대로를 지나 금강을 건넜다.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는 부하 몇백 명을 인솔하고 충청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도 몇만의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1592년(선조 25) 5월 26일 경기도 진위(振威 :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 모이니 하삼도의 관군은 ‘호왈십만(號曰十萬)’이라 하여 그 위세가 당당하였다.
6월 3일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수원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은 조선의 관군이 갑자기 밀어닥치는 것을 보고 도망쳐 용인에 주둔한 일본군과 합쳤다. 삼도의 관군은 군세가 우세한 전라도관찰사 이광이 맹주가 되어 전 군을 지휘하였다.
이 때 용인·수원 등지에는 일본 수군장수 와키사카(脇坂安治) 휘하의 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와키사카는 해전에서 불리하니 육전에 임하라는 명령을 받고 수군 1,600명을 거느리고 육상 경비를 맡고 있었다.
그 주력 1,000명은 서울에 주둔하였다. 잔여 600명은 부장(部將)인 와키사카와 와타나베(渡邊七右衛門) 등이 거느리고 용인 부근 북두문산(北斗門山)과 문소산(文小山) 등에 소루(小壘)를 만들어 지키고 있었다.
이광은 곽영과 권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봉장 이시지와 백광언으로 하여금 일본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조선 관군이 왕성한 것을 보고, 싸우지 않고 원병이 오기를 기다렸다. 주장 와키사카는 곧 휘하 병력을 이끌고 서울을 떠나 용인으로 향하였다.
원병이 도착하자 일본군은 공격 채비를 갖췄다. 백광언과 이시지는 무질서하게 선두에 서서 관군을 지휘하여, 갑작스러운 적의 기습을 막아내지 못하고 다른 장수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잔여 관군들은 이광의 본군(本軍)에 포함되어 함께 광교산 서쪽으로 진출해 진을 쳤다. 군의 사기는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충청도의 관군은 수원으로 전진해 먼저 이 방면의 일본군을 공격하고 연락선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4일 아침 용인 방면으로 철수했으므로, 군사를 돌려 전라도군과 힘을 합쳐 진지를 구축하였다.
6일 아침 이광은 다음 싸움을 위해 일제히 아침을 먹다가 불시에 일본 기병의 기습을 받고 대군이 일시에 무너졌다. 오직 권율만이 휘하 군을 온전히 이끌고 광주로 퇴각해, 그 뒤 7월 8일 배티[梨峙]싸움에서 대승할 수 있었다.
큰 기대를 걸었던 삼도근왕병(三道勤王兵)이 쉽게 무너지자 서울 수복의 꿈은 깨지고, 조선 전 군민(軍民)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이 싸움에서 대패한 죄로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전주로 돌아가 곧 파직되었다. 충청도관찰사 윤선각은 공주로, 경상도관찰사 김수는 경상우도로 돌아갔으며, 충청병사 신익(申翌)은 백의종군하였다.
설명출쳐:한국민족문화대백과
published:18 Feb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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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ssandro Striggio (c.1536-1592 ) - Mass for 40 and 60 voices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 3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구별하여 부른다. 한편 한국에서 '조일전쟁, 임진전쟁'이라 부르기도 하며, 일본에서는 당시 연호를 따서 문록·경장의 역(일본어: 文禄・慶長の役 분로쿠게이초노에키[*])이라 하며,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당시 명(明) 황제였던 만력제의 호를 따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
설명출처:위키백과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 3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구별하여 부른다. 한편 한국에서 '조일전쟁, 임진전쟁'이라 부르기도 하며, 일본에서는 당시 연호를 따서 문록·경장의 역(일본어: 文禄・慶長の役 분로쿠게이초노에키[*])이라 하며,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당시 명(明) 황제였던 만력제의 호를 따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
설명출처:위키백과
published:23 Mar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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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한산도 대첩(해전) - Battle of Hansan Island(閑山島海戦) 1편
한산도 대첩 1편입니다.(한산도 대첩 2편:http://www.youtube.com/watch?v=qJ5cRX-ZGhQ)
1592년(선조 25) 4월 왜군은 수륙병진계획으로 조선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그들 수군이 남해·서해로 침범하던 중 옥포(玉浦)·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지에서 연전연패하였다. 그러자 수군의 유능한 장수였던 와키사카(脇坂安治)는 정예병력을 늘려 73척을 이끌고 거제도 등지를 침범하였다. 수군장수였던 구키(九鬼嘉隆)도 42척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왜수군들의 동향을 탐지한 이순신은 7월 5일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다. 다음 날인 7월 6일 본영을 출발해 노량(露梁 :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이르러 원균이 이끌고 온 7척과 합세하니 3도의 전선은 모두 55척이었다.
7일 저녁 당포 앞바다에 이르러 목동 김천손(金千孫)에게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 :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8일 한산섬 앞바다에 이르러 이를 확인하였다. 그 때 왜수군의 세력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서 지휘관은 수군장수 와키사카였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板屋戰船)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한산섬 앞바다로 유인해 격멸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판옥전선 5, 6척이 왜수군을 공격하여 반격해 오면 한산섬으로 물러나면서 유인하였다. 왜수군들은 그 때까지 패전한 것에 대해 보복하려는 듯 의기양양하게 공격해 왔다.
싸울 기회를 포착한 이순신은 모든 전선이 학익진(鶴翼陣)을 짜서 공격하게 하였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현자총통(地玄字銃筒)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싸움의 결과 중위장 권준(權俊)이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나포하는 것을 비롯해 47척을 분파(焚破)하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왜수군장 와키사카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해 이 해전은 조선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 중 조선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왜병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
한산도 대첩 1편입니다.(한산도 대첩 2편:http://www.youtube.com/watch?v=qJ5cRX-ZGhQ)
1592년(선조 25) 4월 왜군은 수륙병진계획으로 조선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그들 수군이 남해·서해로 침범하던 중 옥포(玉浦)·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지에서 연전연패하였다. 그러자 수군의 유능한 장수였던 와키사카(脇坂安治)는 정예병력을 늘려 73척을 이끌고 거제도 등지를 침범하였다. 수군장수였던 구키(九鬼嘉隆)도 42척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왜수군들의 동향을 탐지한 이순신은 7월 5일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다. 다음 날인 7월 6일 본영을 출발해 노량(露梁 :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이르러 원균이 이끌고 온 7척과 합세하니 3도의 전선은 모두 55척이었다.
7일 저녁 당포 앞바다에 이르러 목동 김천손(金千孫)에게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 :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8일 한산섬 앞바다에 이르러 이를 확인하였다. 그 때 왜수군의 세력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서 지휘관은 수군장수 와키사카였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板屋戰船)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한산섬 앞바다로 유인해 격멸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판옥전선 5, 6척이 왜수군을 공격하여 반격해 오면 한산섬으로 물러나면서 유인하였다. 왜수군들은 그 때까지 패전한 것에 대해 보복하려는 듯 의기양양하게 공격해 왔다.
싸울 기회를 포착한 이순신은 모든 전선이 학익진(鶴翼陣)을 짜서 공격하게 하였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현자총통(地玄字銃筒)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싸움의 결과 중위장 권준(權俊)이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나포하는 것을 비롯해 47척을 분파(焚破)하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왜수군장 와키사카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해 이 해전은 조선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 중 조선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왜병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
published:29 Nov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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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ast Asian War, 1592-1598: International relations, violence and memory
As East Asia regains its historical position as a world centre, information on the history of regional relations becomes ever more critical. Astonishingly, Northeast Asia enjoyed five centuries of international peace from 1400 to 1894, broken only by one major international war – the invasion of Korea in the 1590s by Japan’s ruler Toyotomi Hideyoshi. This war involved Koreans, Japanese, Chinese, Southeast Asians, and Europeans; it saw the largest overseas landing in world history up to that time and devastated Korea. It also highlighted the nature of the strategic balance in the region, presenting China’s Ming dynasty with a serious threat that perhaps foreshadowed the dynasty’s subsequent overthrow by the Manchus, played a major part in the establishment of the Tokugawa regime with its policy of peace and controlled access to seventeenth- and eighteenth-century Japan, and demonstrated the importance for regional stability of the subtle relationship of Korea to both China and Japan. This book presents a comprehensive analysis of the war and its aftermath in all its aspects – military, political, social, economic, and cultural. As such it deepens understanding of East Asian international relations and provides important insights into the strategic concerns that continue to operate in the region at pres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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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08 Apr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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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경주성 전투 - Battle of Gyeongju(慶州-)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임진왜란 때인 1592년 9월 8일 경상좌병사 박진이 왜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경주성을 탈환한 전투.
이에 앞서 박진은 8월 20일 경주성을 공격하다가 패배하고 안강의 본진에 돌아가 있었는데, 그는 재차 경주 탈환을 결의하고 새로운 무기 개발을 모색하였다. 이때 마침 화포장 이장손(李長孫)이 새로운 무기를 발명하였는데, 이것은 쇠조각과 화약을 섞어서 둥그렇게 만든 다음 표면을 쇠로 입힌 후 대완구포로 발사하면 5, 6백보 정도 날아가서 땅에 떨어졌다가 잠시 후에 폭발하는 것이었다. 박진은 이것을 비격진천뢰라 이름붙이고 이를 이용하여 경주성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9월 8일 해가 지자 박진은 선봉대 1,000여명으로 성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성에 접근하였다. 이때 성 안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소속 왜군 수천 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군의 야간공격을 알아차리고 조총을 쏘며 조선군의 접근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에 박진의 군대는 은밀히 성 밑에 접근하여 비격진천뢰 수발을 발사 적군을 폭사시켰고, 이에 놀란 왜군은 좌왕우왕하다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근 1만석의 군량을 버린 채 이튿날 울산 서생포 방면으로 퇴각하였으며, 마침내 경주성은 수복되었다. 그 뒤로 왜군은 비격진천뢰를 두려워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이 경주전투는 최초로 비격진천뢰라는 신무기를 사용하여 승리를 거둔 전투로, 이때 경주성을 탈환함으로써 영천과 경주간에 개설된 적의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설명출처:문화콘텐츠닷컴
임진왜란 때인 1592년 9월 8일 경상좌병사 박진이 왜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경주성을 탈환한 전투.
이에 앞서 박진은 8월 20일 경주성을 공격하다가 패배하고 안강의 본진에 돌아가 있었는데, 그는 재차 경주 탈환을 결의하고 새로운 무기 개발을 모색하였다. 이때 마침 화포장 이장손(李長孫)이 새로운 무기를 발명하였는데, 이것은 쇠조각과 화약을 섞어서 둥그렇게 만든 다음 표면을 쇠로 입힌 후 대완구포로 발사하면 5, 6백보 정도 날아가서 땅에 떨어졌다가 잠시 후에 폭발하는 것이었다. 박진은 이것을 비격진천뢰라 이름붙이고 이를 이용하여 경주성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9월 8일 해가 지자 박진은 선봉대 1,000여명으로 성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성에 접근하였다. 이때 성 안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소속 왜군 수천 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군의 야간공격을 알아차리고 조총을 쏘며 조선군의 접근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에 박진의 군대는 은밀히 성 밑에 접근하여 비격진천뢰 수발을 발사 적군을 폭사시켰고, 이에 놀란 왜군은 좌왕우왕하다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근 1만석의 군량을 버린 채 이튿날 울산 서생포 방면으로 퇴각하였으며, 마침내 경주성은 수복되었다. 그 뒤로 왜군은 비격진천뢰를 두려워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이 경주전투는 최초로 비격진천뢰라는 신무기를 사용하여 승리를 거둔 전투로, 이때 경주성을 탈환함으로써 영천과 경주간에 개설된 적의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설명출처:문화콘텐츠닷컴
published:13 May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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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 de Montaigne (1533-1592) Sarah Bakewell interview
http://www.philosophybites.com/ Montaigne cultivates his liberty by not adhering exclusively to any one idea, while at the same time exploring them all. In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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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Sun-shin or Yi Sun-shin (April 28, 1545 -- December 16, 1598, Korean: 이순신, Hanja: 李舜臣) was a Korean naval commander, famed for his victories against th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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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ep.utm.edu/montaign/ Michel de Montaigne is widely appreciated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figures in the late French Renaissance, both for h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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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all this week Bill has been reviewing and highlighting some interesting features that are available in Excel 2013: Ease of access to utilities and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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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ing Agent: Tim Burroughs
Contact: 208-409-7653
Listing Website: http://isellboisehomes.com/
Keller Williams Realty Boise
Address: 1592 N Watson Way Eagle, ID 83616
MLS #98564300
Bedrooms: 4
Bathrooms: 3.5
Square Feet:4354
Subdivision: Brookwood (Eagle)
Remarks:
Welcome to this spectacular home in desirable Brookwood! Sweeping staircase, gorgeous millwork, soaring ceilings, upgrades galore! Spacious kitchen w/center island & granite countertops overlook fabulous Great Room & Casual Dining. Large main-level Master Suite w/fireplace has elegant Master Bath w/jetted tub & sep shower, huge walk-in closet. Lg. Bonus Room off Bdm #3. Fabulous covered patio offers excellent outdoor living & dining, lots of green space w/view of pond & waterfall. Neighborhood park & p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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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14 Aug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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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ttle of Okpo AD 1592 Imjin War (Joseon & Wokou) 《조선 왜구 옥포해전 玉浦海戰》 1/3
옥포 해전(玉浦海戰)은 1592년(선조 25)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 경남 거제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룬 전승신화의 첫 승전이다. 전투 의의 전쟁 발발 후 조...
옥포 해전(玉浦海戰)은 1592년(선조 25)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 경남 거제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룬 전승신화의 첫 승전이다. 전투 의의 전쟁 발발 후 조...
충주 탄금대 전투(忠州彈琴臺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전멸한 전투이다.
배경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서 부산진성에 이어 동래성마저 함락되고 동래부사 송상현이 전사하자 조정에서는 긴급대책을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저 몇십명만 이끌고 와서 재물이나 조금 약탈하고 자기네 땅으로 되돌아갔던 기존의 왜구들과는 차원이 다른 전란에 직면한 조선에서는 일단 경상도순변사 이일을 파견해보지만 상주에서 이일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났으므로 상주마저 함락되었다. 이 전에 선조는 당시 조선에서 최고의 명장 대우를 받고 있던 신립으로 하여금 왜군을 방어하는 임무를 부여함과 동시에 상방검을 하사하여 신립에게 선조 자신과 같은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 신립은 문경으로 출동하게 되었다.
신립군의 규모
조선군의 숫자에 대해서는 징비록에서는 8천 정예 병력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록에 전하는 바는 이와 다르며,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 '일본사'에 탄금대 전투 당시 신립군의 숫자를 8만이라 적고 전투 상황을 조선 기록들과는 달리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전투준비
1592년 4월 26일 충주에 도착한 신립의 수천 기병은 단월역에 주둔하고 상주에서 패전한 이일을 만나게된다. 이때 종사관 김여물이 신립에게 새재의 높은 언덕에서 궁병으로 왜군을 상대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신립은 충주의 넓은 달천 평야로 가서 궁기병을 이용하는 평야전을 펼치자고 했다. [10][11]
김여물의 논지 - 새재에 있는 바위(높은 언덕)를 방패삼아 궁병으로 공격하면 승산이 있다. (기록에 따라, 이종장, 이일도 이와 같이 주장한다.)
이일의 논지 - 새재를 수비하기에는 늦었으니, 한강으로 물러나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했다.
신립의 논지 - 우리군은 기병이고 일본군은 보병이니 기병을 이용한 전술을 쓰면 보병만 있는 일본군을 쉽게 제압할 수 있으며 따라서 충주의 넓은 평야(달천 평야)로 적을 끌여들이면 우리가 반드시 승리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0381&cid;=1592&categoryId;=159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5105&cid;=4513&categoryId;=4513
충주 탄금대 전투(忠州彈琴臺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전멸한 전투이다.
배경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서 부산진성에 이어 동래성마저 함락되고 동래부사 송상현이 전사하자 조정에서는 긴급대책을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저 몇십명만 이끌고 와서 재물이나 조금 약탈하고 자기네 땅으로 되돌아갔던 기존의 왜구들과는 차원이 다른 전란에 직면한 조선에서는 일단 경상도순변사 이일을 파견해보지만 상주에서 이일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났으므로 상주마저 함락되었다. 이 전에 선조는 당시 조선에서 최고의 명장 대우를 받고 있던 신립으로 하여금 왜군을 방어하는 임무를 부여함과 동시에 상방검을 하사하여 신립에게 선조 자신과 같은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 신립은 문경으로 출동하게 되었다.
신립군의 규모
조선군의 숫자에 대해서는 징비록에서는 8천 정예 병력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록에 전하는 바는 이와 다르며,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 '일본사'에 탄금대 전투 당시 신립군의 숫자를 8만이라 적고 전투 상황을 조선 기록들과는 달리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전투준비
1592년 4월 26일 충주에 도착한 신립의 수천 기병은 단월역에 주둔하고 상주에서 패전한 이일을 만나게된다. 이때 종사관 김여물이 신립에게 새재의 높은 언덕에서 궁병으로 왜군을 상대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신립은 충주의 넓은 달천 평야로 가서 궁기병을 이용하는 평야전을 펼치자고 했다. [10][11]
김여물의 논지 - 새재에 있는 바위(높은 언덕)를 방패삼아 궁병으로 공격하면 승산이 있다. (기록에 따라, 이종장, 이일도 이와 같이 주장한다.)
이일의 논지 - 새재를 수비하기에는 늦었으니, 한강으로 물러나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했다.
신립의 논지 - 우리군은 기병이고 일본군은 보병이니 기병을 이용한 전술을 쓰면 보병만 있는 일본군을 쉽게 제압할 수 있으며 따라서 충주의 넓은 평야(달천 평야)로 적을 끌여들이면 우리가 반드시 승리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0381&cid;=1592&categoryId;=159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5105&cid;=4513&categoryId;=4513
구로다 요시타카(칸베에)의 임진왜란
분로쿠(文祿) 원년(1592년) 임진왜란에도 참가하여 주요 성곽의 수호 등과 제2차 진주 성 전투에 참가하여 고토 모토쓰구...
published:17 Mar 2015
[1592년]군사 칸베에 임진왜란 장면
[1592년]군사 칸베에 임진왜란 장면
구로다 요시타카(칸베에)의 임진왜란
분로쿠(文祿) 원년(1592년) 임진왜란에도 참가하여 주요 성곽의 수호 등과 제2차 진주 성 전투에 참가하여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龜甲車) 등의 설계에도 참여했으나, 분로쿠 2년(1593년)에 5봉행 중 한 명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다툼이 일어난 것이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에 출가, 은거하여 조스이엔쿄(如水円清)란 호을 사용하였다. 그 후에는 나카쓰 성에서 유유자적한 은거생활을 보내었다고 한다.
published:17 Mar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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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사천해전 - Battle of Sacheon(泗川海戰)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42척의 전선을 격침당한 왜군은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 북상을 ...
published:26 Nov 2014
[1592년]사천해전 - Battle of Sacheon(泗川海戰)
[1592년]사천해전 - Battle of Sacheon(泗川海戰)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42척의 전선을 격침당한 왜군은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 북상을 기도하였다. 1592년 7월 8일(음력 5월 29일) 이순신은 판옥선 40여 척을 거느리고 거제를 출발하여[2]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여 사천 선창에 있는 왜군의 정보를 물어 사천으로 추격하였다.
왜군은 사천으로 상륙하여 배는 산 밑에 매어두고 산위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해안가에 정박하고 있던 이순신은 단병접전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처음으로 유인작전을 사용하게 된다. 육지에 대기 중이던 왜군이 승선하여 조선 수군 함대를 쫓아오자 바다에서 뱃머리를 돌려 반격으로 나섰다.
선두는 역시 거북선. 거북선 돌격장인 이언량,이기남이 거북선을 지휘을 하고 돌격하며 왜 수군 사이로 헤집고 다니자 판옥선들이 후미에서 화포 공격을 하며 그 뒤를 따랐다. 결과는 적 함대 13척 모두 격침.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왼쪽 어깨에 총을 맞지만, 마친 후 부하를 시켜 칼끝으로 총탄을 파내게 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의 결과 왜군은 패하여 부산과 거제도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선조는 이 전투의 승리로 이순신에게는 정2품인 정헌대부(正憲大夫)의 벼슬을 하사하였고, 이억기와 원균은 종2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2]
여담으로 이 전투에 참전한 왜군 선박 13척은 '누각과 같이 생긴' 이라는 말이 장계에 있어서 모두 아다케부네로 보는 사람들도 있으나, 아다케부네가 일본에서 매우 희소한 함선이었음을 고려하면 좀 큰 세키부네나 아니면 그냥 누각처럼 생긴 세키부네였을 확률이 높다.
published:26 Nov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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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
[1592년]용인 전투 - Battle of Yongin(龍仁戦闘)
일본군에게 빼앗긴 서울을 되찾기 위해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도내 관군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병마절도사 최원(崔遠)으로 전라도를 지키게 하였다.
자신은 4만의 관군...
published:18 Feb 2015
[1592년]용인 전투 - Battle of Yongin(龍仁戦闘)
[1592년]용인 전투 - Battle of Yongin(龍仁戦闘)
일본군에게 빼앗긴 서울을 되찾기 위해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도내 관군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병마절도사 최원(崔遠)으로 전라도를 지키게 하였다.
자신은 4만의 관군을 이끌고 나주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고 전 부사 이시지를 선봉장에 임명해 용안강(龍安江)을 건너 충청도 임천역(林川驛)으로 진출하였다.
전라도방어사 곽영(郭嶸)은 2만의 관군을 거느리고,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중위장으로 삼고 전 부사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장으로 삼아 여산(礪山) 대로를 지나 금강을 건넜다.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는 부하 몇백 명을 인솔하고 충청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도 몇만의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1592년(선조 25) 5월 26일 경기도 진위(振威 :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 모이니 하삼도의 관군은 ‘호왈십만(號曰十萬)’이라 하여 그 위세가 당당하였다.
6월 3일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수원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은 조선의 관군이 갑자기 밀어닥치는 것을 보고 도망쳐 용인에 주둔한 일본군과 합쳤다. 삼도의 관군은 군세가 우세한 전라도관찰사 이광이 맹주가 되어 전 군을 지휘하였다.
이 때 용인·수원 등지에는 일본 수군장수 와키사카(脇坂安治) 휘하의 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와키사카는 해전에서 불리하니 육전에 임하라는 명령을 받고 수군 1,600명을 거느리고 육상 경비를 맡고 있었다.
그 주력 1,000명은 서울에 주둔하였다. 잔여 600명은 부장(部將)인 와키사카와 와타나베(渡邊七右衛門) 등이 거느리고 용인 부근 북두문산(北斗門山)과 문소산(文小山) 등에 소루(小壘)를 만들어 지키고 있었다.
이광은 곽영과 권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봉장 이시지와 백광언으로 하여금 일본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조선 관군이 왕성한 것을 보고, 싸우지 않고 원병이 오기를 기다렸다. 주장 와키사카는 곧 휘하 병력을 이끌고 서울을 떠나 용인으로 향하였다.
원병이 도착하자 일본군은 공격 채비를 갖췄다. 백광언과 이시지는 무질서하게 선두에 서서 관군을 지휘하여, 갑작스러운 적의 기습을 막아내지 못하고 다른 장수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잔여 관군들은 이광의 본군(本軍)에 포함되어 함께 광교산 서쪽으로 진출해 진을 쳤다. 군의 사기는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충청도의 관군은 수원으로 전진해 먼저 이 방면의 일본군을 공격하고 연락선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4일 아침 용인 방면으로 철수했으므로, 군사를 돌려 전라도군과 힘을 합쳐 진지를 구축하였다.
6일 아침 이광은 다음 싸움을 위해 일제히 아침을 먹다가 불시에 일본 기병의 기습을 받고 대군이 일시에 무너졌다. 오직 권율만이 휘하 군을 온전히 이끌고 광주로 퇴각해, 그 뒤 7월 8일 배티[梨峙]싸움에서 대승할 수 있었다.
큰 기대를 걸었던 삼도근왕병(三道勤王兵)이 쉽게 무너지자 서울 수복의 꿈은 깨지고, 조선 전 군민(軍民)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이 싸움에서 대패한 죄로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전주로 돌아가 곧 파직되었다. 충청도관찰사 윤선각은 공주로, 경상도관찰사 김수는 경상우도로 돌아갔으며, 충청병사 신익(申翌)은 백의종군하였다.
설명출쳐:한국민족문화대백과
published:18 Feb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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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6
Alessandro Striggio (c.1536-1592 ) - Mass for 40 and 60 voices
Alessandro Striggio (c.1536-1592)
Mass for 40 and 60 voices
A SERVICE FOR ST JOHN THE BA...
published:18 Oct 2014
Alessandro Striggio (c.1536-1592 ) - Mass for 40 and 60 voices
Alessandro Striggio (c.1536-1592 ) - Mass for 40 and 60 voices
Alessandro Striggio (c.1536-1592)
Mass for 40 and 60 voices
A SERVICE FOR ST JOHN THE BAPTIST IN FLORENCE
Processio
01 PLAINCHANT (ANON.): Beata viscera 3:31
Oratio
02 ORAZIO BENEVOLI (1605-1672): Laetatus sum 5:41
03 ORAZIO BENEVOLI: Miserere 3:47
Introitus
04 FRANCESCO CORTECCIA (1502-1571): Bonum est confiteri Domino 0:45
05 FRANCESCO CORTECCIA: Gloria Patri 1:10
Kyrie
06 ALESSANDRO STRIGGIO: Kyrie from Missa sopra Ecco sì beato giorno 3:49
Gloria
07 ALESSANDRO STRIGGIO: Gloria from Missa sopra Ecco sì beato giorno 5:45
Graduale
08 FRANCESCO CORTECCIA: Alleluia 0:50
Credo
09 ALESSANDRO STRIGGIO: Credo from Missa sopra Ecco sì beato giorno 8:10
Offertorium
10 ORAZIO BENEVOLI: Magnificat 9:21
Sanctus & Benedictus
11 ALESSANDRO STRIGGIO: Sanctus from Missa sopra Ecco sì beato giorno 3:38
12 ALESSANDRO STRIGGIO: Benedictus from Missa sopra Ecco sì beato giorno 2:36
Agnus Dei
13 ALESSANDRO STRIGGIO: Agnus Dei (I) from Missa sopra Ecco sì beato giorno 2:28
14 PLAINCHANT (ANON.): Agnus Dei (II) 0:36
15 ALESSANDRO STRIGGIO: Agnus Dei (III) from Missa sopra Ecco sì beato giorno 1:54
Communio
16 FRANCESCO CORTECCIA: Tu puer propheta Altissimi 2:28
Motetus
17 ALESSANDRO STRIGGIO: Ecce beatam lucem 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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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Concert Spirituel
Herve Niquet, direction
CHOIR I
Marie-Pierre Wattiez, soprano
Eric de Fontenay, alto
Edomond Hurtrait, tenor
Leonardo Ortega, baritone
Christel Boiron, canto
Gauthier Fenoy, tenor
Justin Bonnet, baritone
Marc Busnel, bass
CHOIR II
Agathe Boudet, canto
Daniel Cabena, alto
Laurent David, tenor
Romain Bockler, baritone
Anne-Marie Jacquin, soprano
Gabriel Jublin, alto
Michael Smith, tenor
Cédric Meyer, baritone
CHOIR III
Nadia Lavoyer, soprano
Dominique Visse, alto
Randol Rodriguez, tenor
Laurent Bourdeaux, baritone
Isabelle Schmitt, canto
Etienne Garreau, tenor
Grégoire Fohet Duminil, baritone
Paul Willenbrock, bass
CHOIR IV
Hélène Richer, soprano
Antoine Strub, alto
Pascal Richardin, tenor
Guillaume Olry, baritone
Edwige Parat, soprano
Edouard Hazebrouck, alto
Vincent Bouchot, tenor
Jean-Baptiste Alcouffe, bass
CHOIR V
Aude Fenoy, soprano
Yann Rolland, alto
Amine Hadef, tenor
Eric Chopin, baritone
Lucia Nigohossian, canto
Nicolas Maire, tenor
David Witczak, baritone
Paul-Henry Vila, bass
ADDITIONAL SINGERS ON THE 60-PART AGNUS DEI
Gwenaëlle Clemino, soprano
Marie Griffet, soprano
Violaine Le Chenadec, soprano
Chantal Santon-Jeffery, soprano
Sonia Tedla Chebreab, soprano
Alice Habellion, canto
Eva Zaicik, canto
Frédéric Bétous, alto
Damien Brun, alto
Jean-Christophe Clair, alto
Arnaud Raffarin, alto
Erwin Aros, tenor
Charles Barbier, tenor
Romain Champion, tenor
Martial Pauliat, tenor
Frédéric Albou, bass
Geoffroy Buffière, bass
François Fauché, bass
Matthieu Heim, bass
Guy Lathuraz, bass
INSTRUMENTALISTS
Eva Godard, cornett
Stefan Legée, alto sackbut
Fabien Dornic, tenor sackbut
Franck Poitrineau, bass sackbut
Elsa Frank, soprano dulcian
Philippe Canguilhem, alto dulcian
Jérémie Papasergio, bass dulcian
Elisabeth Geiger, regal
Francois Saint-Yves, organ
Jean-Luc Ho, harpsichord
Aurélien Delage, spinetta ottivina
Tormod Dalen, basse de violon
Luc Devanne, violone
instruments
organ: Denis Londe, 1993
regal: Quentin Blumenroeder, 1999
spinetta ottavina: Philippe Humeau, 1995
harpsichord: Alain Anselm
tuned by Karoly Mostis, equal temperament 440 Hz
published:18 Oct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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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1592년]일본군의 조선출정(임진왜란) - Japanese invasions of Korea outbreak(文禄・慶長の役の発生)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 3국에 ...
published:23 Mar 2015
[1592년]일본군의 조선출정(임진왜란) - Japanese invasions of Korea outbreak(文禄・慶長の役の発生)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1592년]일본군의 조선출정(임진왜란) - Japanese invasions of Korea outbreak(文禄・慶長の役の発生)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 3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구별하여 부른다. 한편 한국에서 '조일전쟁, 임진전쟁'이라 부르기도 하며, 일본에서는 당시 연호를 따서 문록·경장의 역(일본어: 文禄・慶長の役 분로쿠게이초노에키[*])이라 하며,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당시 명(明) 황제였던 만력제의 호를 따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
설명출처:위키백과
published:23 Mar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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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한산도 대첩(해전) - Battle of Hansan Island(閑山島海戦) 1편
한산도 대첩 1편입니다.(한산도 대첩 2편:http://www.youtube.com/watch?v=qJ5cRX-ZGhQ)
1592년(선조 25) 4월 왜군은 수...
published:29 Nov 2014
[1592년]한산도 대첩(해전) - Battle of Hansan Island(閑山島海戦) 1편
[1592년]한산도 대첩(해전) - Battle of Hansan Island(閑山島海戦) 1편
한산도 대첩 1편입니다.(한산도 대첩 2편:http://www.youtube.com/watch?v=qJ5cRX-ZGhQ)
1592년(선조 25) 4월 왜군은 수륙병진계획으로 조선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그들 수군이 남해·서해로 침범하던 중 옥포(玉浦)·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지에서 연전연패하였다. 그러자 수군의 유능한 장수였던 와키사카(脇坂安治)는 정예병력을 늘려 73척을 이끌고 거제도 등지를 침범하였다. 수군장수였던 구키(九鬼嘉隆)도 42척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왜수군들의 동향을 탐지한 이순신은 7월 5일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다. 다음 날인 7월 6일 본영을 출발해 노량(露梁 :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이르러 원균이 이끌고 온 7척과 합세하니 3도의 전선은 모두 55척이었다.
7일 저녁 당포 앞바다에 이르러 목동 김천손(金千孫)에게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 :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8일 한산섬 앞바다에 이르러 이를 확인하였다. 그 때 왜수군의 세력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서 지휘관은 수군장수 와키사카였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板屋戰船)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한산섬 앞바다로 유인해 격멸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판옥전선 5, 6척이 왜수군을 공격하여 반격해 오면 한산섬으로 물러나면서 유인하였다. 왜수군들은 그 때까지 패전한 것에 대해 보복하려는 듯 의기양양하게 공격해 왔다.
싸울 기회를 포착한 이순신은 모든 전선이 학익진(鶴翼陣)을 짜서 공격하게 하였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현자총통(地玄字銃筒)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싸움의 결과 중위장 권준(權俊)이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나포하는 것을 비롯해 47척을 분파(焚破)하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왜수군장 와키사카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해 이 해전은 조선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 중 조선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왜병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
published:29 Nov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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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ast Asian War, 1592-1598: International relations, violence and memory
As East Asia regains its historical position as a world centre, information on the history...
published:08 Apr 2015
The East Asian War, 1592-1598: International relations, violence and memory
The East Asian War, 1592-1598: International relations, violence and memory
As East Asia regains its historical position as a world centre, information on the history of regional relations becomes ever more critical. Astonishingly, Northeast Asia enjoyed five centuries of international peace from 1400 to 1894, broken only by one major international war – the invasion of Korea in the 1590s by Japan’s ruler Toyotomi Hideyoshi. This war involved Koreans, Japanese, Chinese, Southeast Asians, and Europeans; it saw the largest overseas landing in world history up to that time and devastated Korea. It also highlighted the nature of the strategic balance in the region, presenting China’s Ming dynasty with a serious threat that perhaps foreshadowed the dynasty’s subsequent overthrow by the Manchus, played a major part in the establishment of the Tokugawa regime with its policy of peace and controlled access to seventeenth- and eighteenth-century Japan, and demonstrated the importance for regional stability of the subtle relationship of Korea to both China and Japan. This book presents a comprehensive analysis of the war and its aftermath in all its aspects – military, political, social, economic, and cultural. As such it deepens understanding of East Asian international relations and provides important insights into the strategic concerns that continue to operate in the region at present.
published:08 Apr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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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경주성 전투 - Battle of Gyeongju(慶州-)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임진왜란 때인 1592년 9월 8일 경상좌병사 박진이 왜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경주성을 탈환한 전투.
이에 앞서 박진은 8월 20일 경주성을 공격하다가 패배하고 ...
published:13 May 2015
[1592년]경주성 전투 - Battle of Gyeongju(慶州-)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1592년]경주성 전투 - Battle of Gyeongju(慶州-)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임진왜란 때인 1592년 9월 8일 경상좌병사 박진이 왜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경주성을 탈환한 전투.
이에 앞서 박진은 8월 20일 경주성을 공격하다가 패배하고 안강의 본진에 돌아가 있었는데, 그는 재차 경주 탈환을 결의하고 새로운 무기 개발을 모색하였다. 이때 마침 화포장 이장손(李長孫)이 새로운 무기를 발명하였는데, 이것은 쇠조각과 화약을 섞어서 둥그렇게 만든 다음 표면을 쇠로 입힌 후 대완구포로 발사하면 5, 6백보 정도 날아가서 땅에 떨어졌다가 잠시 후에 폭발하는 것이었다. 박진은 이것을 비격진천뢰라 이름붙이고 이를 이용하여 경주성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9월 8일 해가 지자 박진은 선봉대 1,000여명으로 성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성에 접근하였다. 이때 성 안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소속 왜군 수천 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군의 야간공격을 알아차리고 조총을 쏘며 조선군의 접근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에 박진의 군대는 은밀히 성 밑에 접근하여 비격진천뢰 수발을 발사 적군을 폭사시켰고, 이에 놀란 왜군은 좌왕우왕하다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근 1만석의 군량을 버린 채 이튿날 울산 서생포 방면으로 퇴각하였으며, 마침내 경주성은 수복되었다. 그 뒤로 왜군은 비격진천뢰를 두려워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이 경주전투는 최초로 비격진천뢰라는 신무기를 사용하여 승리를 거둔 전투로, 이때 경주성을 탈환함으로써 영천과 경주간에 개설된 적의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설명출처:문화콘텐츠닷컴
published:13 May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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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s of stone walls and gold-plated roof tiles believed to be the ruins of Shigetsu Castle have been discovered at the construction site for a new apartment complex in Fushimi Ward, Kyoto, a private research firm has announced. Feudal leader Toyotomi Hideyoshi began construction on the castle in 1592, a year after he ended his regency....
TEMPE, Ariz.--(BUSINESS WIRE)--Limelight Networks, Inc. (Nasdaq.LLNW) will report financial results for the second quarter 2015 on Monday, August 3, 2015 at approximately 4.00 p.m. EDT (1.00 p.m. PDT). At approximately 4.30 p.m. EDT (1.30 p.m ... Investors can access this call toll-free at (877) 388-8480 within the United States or +1 (678) 809-1592 outside of the United States. The conference call will also be audiocast live fr ....
Limelight Networks, Inc. (Nasdaq.LLNW) will report financial results for the second quarter 2015 on Monday, August 3, 2015 at approximately 4.00 p.m. EDT (1.00 p.m. PDT) ... Investors can access this call toll-free at (877) 388-8480 within the United States or +1 (678) 809-1592 outside of the United States....
(Source. Fitch Inc).18 Jun2015 9.00 PM Fitch. HK Chief Exec Debate Second to Economics as CreditFactor. Fitch Ratings-Hong Kong/London-18 June 2015. The defeat of a proposed new electoral system in Hong Kong's Legislative Council is the latest stage in an intense political debate over the structure of chief executive elections in the territory ... The territory faces its share of longer-term issues, though ... Contact. ... +44 20 3530 1592 ... (noodl....
(Source. Greene King plc). LONDON--(BUSINESS WIRE)--. FORM8.3. PUBLIC OPENING POSITION DISCLOSURE/DEALING DISCLOSURE BY. A PERSON WITH INTERESTS IN RELEVANT SECURITIES REPRESENTING 1% OR MORE. Rule 8.3 of the Takeover Code (the 'Code'). 1. KEY INFORMATION (a). Full name of discloser..Barclays PLC. (b). Owner or controller of interest and short. positions disclosed, if different from 1(a).. (c) ... GREENE KINGPLC ... (d) ... offeror/offeree.. (e) ... 8.1592GBP....
How many of us are guilty of mindlessly singing nursery rhymes like Baa Baa Black Sheep to our children? We all are. But do you really know the sinister backstories to these seemingly innocuous children’s nursery rhymes? ... “It is a way of completing the world through rhyme,” he said in an interview with NBC Today ... 1. Baa baa black sheep ... 2 ... 3 ... Georgie Porgie is a caricature of George Villiers, a bisexual nobleman who lived from 1592 to 1628....